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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클볼, 익숙함 사이로 들어오다.

익숙했던 풍경 속의 낯선 움직임

by Kafka

요즘 가끔 테니스를 치다 보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동네에 있는 공립 코트도 그렇고, 레슨을 받으러 들르는 시립 코트 또한 마찬가지다.

바로 피클볼의 등장이다. 그리고 그 인기가, 심상치 않다.


최근엔 프로 테니스 선수들 중 일부가 피클볼로 전향하는 사례도 보이는데, 내가 직접적으로 느끼는 변화는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

바로 테니스 코트에서 피클볼을 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점이다.

내가 사는 이곳은 서호주의 지방 소도시다.

주로 여름시즌 평일 저녁, 그리고 주말이에 꽤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이 테니스를 즐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국에서는 요즘 스스로를 ‘테린이’라 부르는 젊은 테니스 입문자들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지만,

여기는 아무래도 인구가 적다 보니, 젊은 층의 유입은 좀처럼 체감하기 어렵다.


물론 테니스는 여전히 인기 있는 스포츠다.

하지만 축구나 농구처럼, 특정 팀을 응원하며 시즌 내내 즐기는 종목들과 비교하면 대중적인 접근성에서 조금 밀리는 면이 있다.

공 하나와 운동화만 있으면 금세 시작할 수 있는 그런 스포츠들과 달리, 테니스는 코트와 라켓, 파트너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치는 방법부터 배워야 제대로 된 게임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진입장벽이 다소 높은 편이다.


그런데 이 피클볼이라는 종목은 좀 다르다.

기존 테니스 코트 안에서 더 적은 인원이, 더 쉽게 즐길 수 있고, 엘보나 어깨, 무릎 같은 부상의 위험도 테니스에 비해 적다. 나이, 성별의 차이도 비교적 덜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내가 활동하는 테니스 클럽의 노년층 가운데, 꽤 많은 이들이 하나둘 피클볼로 옮겨가고 있다.

내가 느끼는 서호주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는 다소 소극적이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변화는 꽤 흥미롭고도 놀랍다.


피클볼이 인기를 끌면서, 자연스레 공간 문제가 생긴다.

전용 코트를 짓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보니, 기존 테니스 코트에 선을 덧그어 코트를 공유하는 방식이 많다.

사용 빈도가 낮은 코트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평소에도 잘 쓰이던 코트에서는 테니스 플레이어들과 피클볼 이용자들 사이에 마찰이 생기기도 한다.

피클볼을 처음 보았을 땐 그저 소수의 호기심이라 여겼다. 그런데 인원이 점점 늘어나고,

그 존재감도 꽤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이나 호주의 대도시에서는 테니스 클럽 차원에서 피클볼을 금지하는 일도 생긴다고 한다.

이에 반발한 피클볼 동호인들이 작게나마 시위를 벌였다는 뉴스도 본 기억이 있다.

물론 내가 사는 지역에선 아직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건, 우리 테니스 코치의 태도 변화다.


피클볼을 처음 접했을 무렵, 그는 다소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쳐본 적 있냐”는 내 질문에

“뭘 그런 걸 쳐” 하고 웃어넘기던 사람이다.

하지만 새로운 운동이 늘 그렇듯,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더 활기를 띠기 마련이다.

피클볼 동호회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 모임을 주도하는 클럽장 같은 인물들은 대체로 밝고, 친절하며, 새로운 멤버를 끌어들이는 데 적극적이다.

피클볼이 신기해 구경만 하던 나에게도,

같이 테니스를 치던 사람들에게도 “한 번 와서 쳐보라”는 제안을 여러 번 해줬다.

아마 우리 코치도 비슷한 제안을 받았을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그도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을 테니까.


그랬던 그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피클볼 라켓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조만간 피클볼 레슨도 병행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들려줬다.

난 그리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호주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곳의 스몰톡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렇게 천천히 변해 온 것 같다.

스몰톡 끝에서 문득,

익숙한 풍경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낀다.


누구도 변화를 말로 예고하진 않지만,

라켓을 바꿔 쥐는 누군가의 손끝에서,

테니스 코트 안에 덧그어진 선에서,

주변 풍경들도 그렇게 조용히 번져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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