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일은 그런 욕심의 합의점이다.
요즘 내 일상은 활자로 뒤덮여 있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네이버에 로그인하여 메일함을 확인한다. 수많은 광고 메일 속에서 일간 박현우와 일간 이슬아를 찾는다. 각각 해당 메일함에 옮기고 우선 일간 박현우를 읽는다. 오늘 아침엔 드라마 <라이프>가 왜 <비밀의 숲>처럼 되지 못했는지에 대해 읽었고 생각했다. 일간 박현우 6호의 마지막글이었다. 그는 구독자가 행복하길,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길 빌며 메일을 마무리지었다. 나는 7호 구독 신청을 했다. 풀무원 양배추&브로콜리 주스와 아메리카노, 일간 박현우 없이 회사에서의 아침을 견딜 자신이 없다. 양배추 주스로 위를 보호하고 커피로 해치는 것처럼, 일간 박현우로 마음과 머리를 일깨워야 일하며 썩힌 마음에도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어 그나마 온전할 수 있다. 플라시보 효과뿐일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어쨌든 효과가 있다는 거니까.
일간 이슬아는 퇴근 후 식사 시간용이다. 어떻게 이렇게 매일 감정이 일렁거리는 순간을 남길 수 있을까, 이 사람의 하루는 다를까, 생각하다가 오늘 하루만 해도 수십 번 넘실댄 나의 마음을 떠올린다. 더이상 쉽게 다치지는 않는데, 너무 쉽게 지치는 마음들. 일간 이슬아가 지친 마음을 채우지는 못하지만 채우지 못한 채로도 곤히 잠들 수 있게 해준다. 이상하지.
자기 전에는 글을 쓴다. 내멋대로 '주오일 쓰터디'라고 부르는 주 5일 뭐라도 쓰는 스터디 카페에 일단 글이란 걸 남겨본다. 뭘 쓸까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쓰기 어려워진단 걸 알았고, 일단 쓰고 나서 별로면 그때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임을 배웠다. 요즘엔 초현실주의인지 뭔지의 무의식적 글쓰기처럼 되는 대로 써버리고 뒷마무리는 내일의 나에게 넘겨버린다. 어쩌면 내게 제일 필요한 방법론이 이런 거였는지도 몰라. 조금 만족스러워진다.
요즘엔 읽어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읽히기 위해 쓰는지 말하고 싶어서 쓰는지 구분되지 않는데, 지나치게 솔직하게 쓰면서도 다음 날 게시물 옆의 조회수를 확인하는 걸 보면 둘 다인 듯하다. 그럼에도 제형과 학곰이 아닌 다른 사람이 카페에 들어온다면 이렇게 솔직하게는 못 쓸 거야. 주오일 학곰과 주오일 제형은 일하는 중간에 읽는다. 내가 살고 있는 시간에 제형과 학곰도 어떻게든 살고 있겠구나, 생각한다. 그다지 애처로운 일은 아닌데 애틋해지는 그런 함부로인 마음이 있다.
글을 읽고 쓸 때는 내가 쓸모없이 존재해도 좋을 인간처럼 느껴진다. 글을 사고 팔 때는 내 쓸모가 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울적해진다. 아무래도 좋을 일상 없이 아무래도 좋을 인생을 살고 싶은 모순된 욕심처럼, 쓸모를 시험하지 않으면서 쓸모있고 싶다. 읽고 쓰는 일은 그런 욕심의 합의점이다.
어제는 조개껍데기 풍경을 만들다 잠들었다. 조개껍데기끼리 부딪치며 절걱대는 소리를 좋아한다. 접착제가 나무에 닿으니 요상한 타는 냄새가 났다. 그저께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늦게까지 마구잡이로 웃고 떠들었는데, 순간적으로 접착제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목구멍이 뜨겁게 타버리려나. 딱히 마시고 싶지는 않았는데 자기 전 누워서 곰곰이 생각하니 마시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하루 아침에 끝나는 인생은 없고, 나는 남겨질 일상들을 떠올린다. 어제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 때문일거야. 그래서 오늘은 쓴다. 맥 짚지 못한 우울을.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는, 글이 남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해 모니터 앞에 앉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나는 오늘 나를 허투루 마주하지 않았다. 얼버무리지 않는 하루는 아무래도 좋고 아무래도 소중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