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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연 Aug 03. 2018

지워진 피프티스

50대가 되면 죽어버려야지, 생각했다.

애인은 오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평균 수명이 이미 80대로 향해 가는 시대에 오래 살고 싶다면 대체 몇 살을 바라보는 걸까.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50대 중순 즈음에 죽고 싶다고 말했다. 잠시 고요해졌다. 우리 사이가 멀어진 건 아니었는데, 서로의 미래가 잠시 멀어졌다.


50대 후반을 기점으로 찍은 이유는 단순하다.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어른, 부모님이 50대 중후반이 되면서 자리를 잃고 가난해졌기 때문이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는 관용어구를 들으면 흔히 70대 이상을 떠올리지만, 가난과 망각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대기업을 비롯한 대한민국 직장인의 평균 퇴직 연령이 49~51세라고 한다. 후에 치킨집을 차릴지, 다른 기업에 명예 고문직으로 갈지, 전원 생활을 꾸리기 위해 귀농할지는 모르지만 평균 연령의 반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셈이다. 비정규직의 처지는 더 처참하다. 돈을 모으기 힘든데다 연금이 없는 경우가 많아 직업을 잃는 동시에 (그간 벌어온 돈으로 편히 누릴 시간도 없이 바로) 가난해진다. 그렇다고 그 나이에 새로운 일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아르바이트로 일하자니 시키기 어렵다고 기피하고, 전문성을 살리자니 경력이 부담된다고 기피한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건, 현대사회 누구나 그렇듯 자신의 쓸모(사회적 기능)를 잃는 동시에 위축된다는 점이다. 문화센터 클래스 등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며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또다른 면모를 발견하는 일은, 그 새로운 무언가가 취미일 때에만 유효하다. 목적이 일로 되는 순간,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일마저 자존감을 위협하고 만다. 망각 때문이다.


장년의 망각이라고 하면 흔히 치매의 전조를 떠올리겠지만, 내가 말하는망각은 과거의 망각보다는 미래의 망각에 가깝다.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때, 전과 같은 속도를 바랄 수는 없는 상태. 어제 배운 걸 오늘 잊는 바람에 배우는 즐거움이 크지 않고, 즐거움이 크지 않으니 배우기 더 어려워진다. 그 일이 젊은 세대에게는 당연한 일, 이를 테면 엑셀 혹은 스마트폰 기능과 같은 분야라면 더더욱.


퇴직과 연금까지의 약 10년. (1969년 이후 출생자 기준으로 국민연금은 65세부터 받을 수 있다.) 50대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살 수 있을까. 손을 맞잡고 걷는 노년의 부부를 떠올리기 전에 장년의 부부와 비혼의 장년을 생각해보지만 어떤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실제로 이 글 이미지를 위해 중장년 키워드를 넣어 검색해보았지만 검색결과는 머리가 새고 손이 주름진 노년의 이미지뿐이었다.)  함께 장년기를 보내고 싶은 사람보다도 그 사람 앞에서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미래를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이 궁금하다. 아직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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