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족관 속 멍게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저도요."
어떤 맥락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분명한 건 '수족관 속 멍게'라는 표현이 내게 꽤 인상 깊었다는 것이다. 수족관 속 물고기도, 수초도, 새우도 아닌 '멍게'.
바닷속이 아닌 '수족관' 속 멍게.
왜 하필 그들은 많고 많은 것들 중에 '수족관 속 멍게'가 되고 싶었을까?
바다와 수족관은 무엇이 다를까? 자연의 일부인 바닷속 멍게와 다르게 수족관 속 멍게는 '보호'받는 존재이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지만, 광활한 수조 속에서 멍게는 '안전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많고 많은 수중 생물 중 멍게일까? 멍게의 통상적인 활동반경은 충격적인데, 성체가 되면 바위에 붙거나 해저바닥에 파묻혀 살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고 한다.
제로 센티미터의 활동반경. 완전히 고정된 삶.
더 흥미로운 것은 성체가 되면 유생일 때 지니고 있던 자신의 뇌를 소화시킨다는 것이다. 성체일 때는 흘러들어오는 먹이만 잡아먹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많은 뇌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성장하지만 곧 가장 단순한 상태로 회귀하게 되는 퇴행이 아이러니한 녀석이다. 과거를 털어버리고 살아가는 멍게가 부럽게 느껴진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이 퇴행이 부럽다.
어른이 되면 멋진 삶을 살 줄 알았는데, 나도 '수족관 속 멍게'같은 삶을 꿈꾸고 있다. 도전하고, 부딪히고, 깨지는 것보다는 이젠 안전하게 보호받는 삶이 좋다. 흘러오는 것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완전한 수동성을 꿈꾸는 삶을 살아낸다. 생각 과부하에서 벗어나는 멍게 같은 삶.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삶에 대해 갈망한다. 우습게도 이 삶은 전시된다. 투명한 유리벽 너머의 관찰자들이 내 삶을 전시하지만 나는 그 투명한 벽 안에서 보호받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다의 혹등고래'같은 삶을 꿈꾼다. 혹등고래는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친다. 얼음장 같은 바다와 열대의 따뜻한 바다를 오가며, 몸 하나로 계절을 따라 움직인다. 그 장대한 이동 속에서 고래는 매 순간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불안하고 우울하지만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인다. 감정을 받아들이며 나는 존재한다.
고래는 길고 낮은 울음으로 바다를 채운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동료에게도 닿는 그 노래는, 외로운 듯하면서도 연결을 갈망하는 신호다. 나는 그 노래가 내 마음의 메아리와 닮았다고 느낀다. 멍게처럼 전시되는 하루를 보내다가도, 때로는 SNS에 나를 전시하기도 한다. 보이고 싶으면서도 숨고 싶다. 이 모순된 욕망 사이에서 나는 하루는 살아내고, 하루는 살아간다.
살아내기.
살기.
견디기.
경험하기.
단순히 생존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차이.
나는 여전히 멍게와 고래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 사이가 어쩌면 나의 바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브런치라는 수족관 속에서 안전하게 전시되기도 하고, 혹등고래처럼 낯선 이들에게 노래를 건네기도 한다. 보호받으면서도 연결되는 이 공간에서, 나는 조금씩 작가의 꿈을 이루어간다.
글을 쓰는 일은 결국 멍게와 고래가 공존하는 내 바다를 세상과 나누는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