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소통
"요즘 약속 왜 이렇게 많아?"
"너 이제 E야?"
"모임이 대체 몇 개야?"
근래 들어 지인들에게 자주 듣는 말들이다. 이미 외출의 횟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 소모를 넘어선 지 한참 되었다.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마음에는 공허가 밀려온다. 손끝이 얼어붙은 듯 차갑다. 몸은 지쳐 있는데, 머리는 멈추질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 쥐가 곡식을 갉아먹듯 조금씩 사라지는 내 안의 나는 이제 한 줌도 남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기억 저편에 있던 좋았던 것들만 떠오르고, 나는 하얀 매트리스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피곤한 외출, 의미 없는 대화만 가득한 만남들.
그래도 몸은 말한다.
'멈추지 마. 움직여야 해. 멈추면 죽을 거야. 무서워.'
그래도 나가야 한다. 안 나가면 무너질 거야. 무너지는 게 두렵다. 두려움 때문에 또 몸을 일으킨다. 나는 나를 갉아먹으면서 나를 녹여내고 있다. 연료를 태워서 엔진을 돌리는 것처럼 비효율적이지만, 그 연소 과정 자체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고민에 빠진다. 오늘 외출을 하는 게 맞을까? 피곤한데 그냥 집에 있고 싶다. 하지만 집에 있으면 나쁜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나를 너무 미워하는 걸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오늘도 몸을 일으킨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8차선 도로. 도로 위의 차들을 보며 생각한다. 이렇게 일찍 누군가는 집을 나섰구나. 나도 집을 나서야지.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야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고양이를 안아 토닥이고 욕실로 향한다. 거울에 비친 나는 웃지 않는다. 부스스한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서 애써 거울을 지나쳐 재빨리 샤워를 한다.
애를 써야 한다. 애를 쓰지 않으면 거울을 지나칠 수 없다. 거울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나를 미워한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옷장을 열면 고민에 빠진다. 셔츠를 입을까? 너무 단정한가. 좀 예쁜 옷을 입어볼까? 아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고민 끝에 입는 옷은 늘 비슷하다. 그렇게 애써 꾸민 옷은 결국 대화 속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 어휴, 요즘 물가 장난 아니네, 그렇지 않아?"
사실은 어젯밤 한숨도 못 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맞아요, 요즘 비싸죠’ 하고 웃었다.
말하고 싶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숨기고 또 숨긴다.
"이 드라마 봤어요? 재밌다던데."
"날씨 좋네요. 아, 주말엔 비 온다던데."
기억에도 남지 않는 대화들만 주고받는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무도 진심으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도 내 진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모두 외로움에 모여있으면서도 모두가 표면만 핥아대는 대화만 오간다. 물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쓴 것처럼 지나가고 나면 뭔가 있었냐는 듯이 뻔뻔하게 같은 모양이 된다.
텅 빈 소통.
에너지를 쓰고,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다.
연결을 갈망하면서, 동시에 도망치고 싶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공허한 연결.
텅 빈 연결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공허한 물 위에 또다시 글씨를 쓴다.
사라질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