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이의 일상 이야기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다. 내가 할게.”
“아니 제가 할게요.”
빗자루 하나를 두고 네 개의 손이 아웅다웅한다. 동방예의지국. 장유유서. 형님 동생. 그런 정서 속에 잡스러운 일을 아랫사람이 도맡아 하는 문화는 세대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이다. 젊은 세대는 장유유서의 정신이 깊게 박힌 사람을 ‘꼰대’라며 혐오한다.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것들은 말이야.’하며 한탄한다. 소심이들은 어떤가? 나는 두 세대의 사이에서 빗자루를 든다. 아랫사람이 내 빗자루를 뺏으려 들면 별거 아니니 내가 하겠다고 한다. 윗사람에게서는 한사코 빗자루를 뺏아 낸다. 다들 하기 싫어하니 눈치가 보여서 하게 된다. 꼰대로 보일까 봐 내가 하고, 싸가지가 없다 할까 내가 한다. 그래서 단체생활에서 잡일은 항상 내 담당이다. 잡일을 해내면 잡음도 같이 사라진다. 그게 단체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 황당한 단체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매일 활동이 끝나면 청소를 하고 마무리를 해야 했는데 어른들은 청소를 하지 않는다. 젊은 친구들은 마치기 전에 미리 도망가버린다. 늘 몇 안 되는 사람들만 남아서 청소를 했다. 어떻게 단체가 유지되어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하루는 동생들과 술을 먹다가 한 명이 하소연을 시작했다. 손하나 까닥하지 않는 ‘꼰대’들이 싫단다. 활동은 다 같이 하고 청소는 왜 자신만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동생은 늘 묵묵히 자진해서 청소를 하는 친구였다. 그래서 나는 그 동생은 불만 없이 해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 동생이 먼저 나서서 불만을 토로하니 당황스러웠다. 물론 자리에 있던 모두가 동생의 말에 동조했다. 당연한 듯 젊은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모습이 보기 안 좋다는 것이다.
다음날 어른이 잡은 빗자루를 빼앗으려 두 손을 뻗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진해서 청소를 하시는 어른의 빗자루를 뺏음으로써 또 한 명의 ‘꼰대’를 양성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몇 번 뺏어내고 나면 다음부터는 자연히 빗자루에 손이 가지 않게 될 것이었다. 나의 과한 눈치로 인한 행동이 동생들에게 계속 짐을 지어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미안했다. 나 때문에 동생들은 꼰대질에 더 쉽게 노출되었고, 그런 불만이 커져 동생들은 단체에서 탈퇴했다. 어른들은 ‘꼰대’도 있었지만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근데 내가 항상 빗자루를 뺏아 냈다. 몇 번 뺏기다 보면 자연스러워지는 법이다. 결국 내가 ‘꼰대’를 만들었고, 동생들에게 폐를 끼쳤다. 동생들이 탈퇴해서 인원이 줄어드니 단체에도 피해를 줬다.
내가 감수해야 하는 손해만 생각했었다. 잠깐만 하면 되는 청소인데 내가 하고 말지 했다. 그러면 평화가 유지될 거라고 생각했다. 웬걸. 나는 단체에서 가장 암적인 존재, 바이러스의 숙주였다. ‘꼰대’를 양성하고, ‘꼰대질’을 유도하고 있었다. 젊은 친구들을 ‘꼰대질’이 빗발치는 포격장으로 등 떠밀었다. 그렇게 꼰대 문화가 발달하도록 이바지 해왔다. 내가 어른들의 빗자루를 뺏지 않았더라면 어른들은 계속 빗자루를 들었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걸레나 다른 할 일을 찾아 했을 것이다. 그럼 더 쉽게, 금방 끝나버릴 청소였다. 그걸 내가 방해하고 있었다. 비가 오니 다들 피할 곳을 찾아 나서는데 나는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힘들게 피할 곳을 찾던 사람들도 나무 밑으로 모여든다. 누구도 완벽히 비를 피할 곳을 찾으러 나서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니 나뭇잎 사이로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에도 옷은 다 적어버렸다. 눈 앞에 보이는 갈등을 눈치가 보인다는 이유로 손해를 감수하며 가볍게 해결하려 할 때가 많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손해 보기가 싫어서 해결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작은 손해만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불편한 분위기를 감수할 만큼 의미 있는 갈등일 수 있도 있다. 소심한 마음에 보던 눈치가 행동으로 이어질 때면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의 착한 뻔뻔함이 무시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눈치도 과하면 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