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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말이 Feb 03. 2020

'애정남'이 필요한 지금

소심이의 일상 이야기

 예전 개그프로 중 실 생활 속 애매한 것들을 정리해주는 ‘애정남’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축의금은 얼마를 내야 할지, 부부의 가사분담은 어떻게 할지, 지인 간의 빚 독촉 기준은 어떻게 될지 등 생활 속에서 딱 부러지게 결정하기 애매한 것들을 나름의 근거로 정해주는 프로였다. 속 시원히 묵은 갈증을 내려주는 사이다 같은 느낌이 있어서였을까 인기도 꽤 있었던 코너였다. 

    

 하지만 결국 코너는 시간이 지나 없어졌고,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생활 속 애매한 것들은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 개그 코너에서 정해준 대로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도 우습다. 그래서 며칠 전 모바일 청첩장을 받은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직도 고민이 된다.     


 무언가 고민이 되는 애매한 상황에서 딱 부러지게 결정할 수 있는 결단력을 가지기란 참 어렵다. 특히 소심이들은 혹시나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남들이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힘들어한다. 그렇지만 결국 결정을 내려야 할 문제이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루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중 우연히 같은 가게에 있던 대학교 선배를 만나 같이 자리를 하게 되었다. 같은 과이면서 동아리 활동도 같이했던 터라 학교를 다닐 때는 꽤 가깝게 지냈지만 졸업 후에 연락이 뜸해진 선배였다. 그래도 친구들 중 몇몇은 아직도 친하게 지내던 터라 선배가 이 주 뒤에 결혼한다는 소식 정도는 들어 알고 있었다. 선배는 내게 잘 지냈냐는 인사와 함께 결혼식에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인사치레의 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부터 고민은 시작됐다.     


 선배와 친했던 건 맞지만 요즘은 연락도 잘하지 않아 사이도 멀어진 데다 지나가는 인사말인데 너무 곧이곧대로 듣고 찾아가서 선배가 당황스러워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계속 친분이 이어지지 않으면 축의금이 아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종종 마주칠 사이인데 모른 척 넘어가기도 어려웠다. '애정남'에서 이런 걸 정해줬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숙취와 함께 머릿속이 선배의 결혼식 생각으로 가득 차 무척이나 괴로웠다. 갈까 말까 하는 고민은 설득과 설득이 꼬리를 물어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마땅히 답이 생기진 않았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느라 결국 침대에서 소중한 휴일을 통째로 날린 듯했다.     


 고심하느라 고통스럽던 하루가 지나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일상에 파묻혀 어느새 선배의 결혼식은 뒷전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선배의 결혼식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에 자신을 픽업해달라는 거였다. 친구는 당연히 내가 갈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아직 결혼식에 참석할지 고민 중이라는 말에 친구는 자신이 심심하니 같이 가자고 졸라댔다. 그렇게 결국 친구를 핑계 삼아 결혼식에 가기로 결정했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은 통화로 이렇게 쉽게 결정될 문제였는데 왜 그렇게 숙취로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하루 종일 고민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참석한 결혼식은 와줘서 고맙다는 선배의 인사와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의 인사로 끝이 났다. 내가 걱정하던 머쓱해하는 선배나 축의금이 아까워 후회하는 모습의 나는 없었다.  

   

 집에 돌아오고 나니 결혼식에 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 그런지 특별히 문제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쉽게 들었다. 주말에 다른 지인들을 만날 시간도 생겼을 것이고 축의금도 아꼈을 수 있다. 우연히 선배와 만나더라도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한마디면 넘어갔을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인 양 소중한 휴일 하루를 통째로 앗아갔던 문제가 실상 별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 순간에 그토록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택지 중 어느 하나가 특별히 좋거나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득실을 명확히 따지기 어려운 애매한 선택지를 두고 결단을 내리는 것은 마치 논술형 문제를 객관식으로 맞히려 드는 것과 같다. 정답이 정해진 것이 아닌 수험자의 생각이 어떤지 묻는 논술 문제를 푸는데 1번 아니면 2번 둘 중 하나의 객관식 답을 고르려니 머리만 아프고 결정은 내리기 힘든 것이다.    

 

 ‘애정남’도 없는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애매한 문제들이 수도 없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늘 주변을 의식하고, 남의 눈치를 보며 선택에 어려움을 겪다 보면 인생이 갈수록 가시밭길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이제 애매한 상황과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애매해서 결정하기 어렵다기보다, 애매하니 대충 결정하자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애매한 것들 중 대부분은 막상 결정해보면 그 결과가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히려 남을 의식하고 남 눈치를 보다 보면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을 적지 못해 수험장을 이탈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쉽게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쉽게 느끼면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큼 세상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없다.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에서 올바른 정답을 찾으며 살아가기도 벅찬 인생인데, 정답이 없는 문제에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너무 큰 손해이다. 그래서 나도 이번 지인의 결혼식은 동전 던지기로 정해 볼까 한다. 몇 번 마주친 사이이지만 영영 안 볼 사이도 아니다. 안 가기로 결정하였다면 못 갈 핑계를, 가기로 결정하였다면 축하하는 마음을 준비하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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