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가로 살'우리집'의얼개 짜기 - 靜中動의 運氣로 얼개를 보니
단독주택을 지으려고 상담을 청하는 분들의 집에 대한 생각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 부부’만의 행복한 노후 생활을 위해서 집을 지으려 한다는 것이다. 은퇴 후에는 번잡한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숨듯이 시골에 집 하나 지어살고 싶다는 생각이다.
또 갑갑한 아파트 생활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단독주택에 대한 막연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아파트 생활에 길들여져 있는데도 단독주택을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는 그림 같은 집이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한 상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을까? 막상 단독주택을 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만족한 생활을 하는 분은 많지 않아 보인다.
전원에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다 보면 가장 힘든 것이 외로움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나이가 들기 전에 농사를 지으며 살기 위해 시골로 들어가는 귀농은 정착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집만 지어 사는 귀촌의 경우는 다시 도시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부부만 사는 생활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활의 근거지를 도시에서 전원으로 옮길 경우 행동반경은 집 안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설사 집 근처에 이웃이 있다고 해도 단조로운 생활의 리듬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단독주택의 얼개를 잡으면서 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서 넣어야 한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어떻게 짜 넣을 수 있을까?
단독주택을 짓기 위한 첫 명제는?
제주도에 터를 마련한 분이 단독주택을 짓겠다고 찾아왔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산에서 살아왔는데 여생은 제주에서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집의 규모는 부부만 살면 되니 큰 집은 필요 없다며 모눈종이에 그린 평면 스케치도 보여주었다.
일단 건축주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기획단계의 얼개 작업에 들어갔다. 현장을 다녀와서 집의 얼개를 잡는 과정에서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 집을 짓고 나서 자식들이 찾아오면 잘 수 있는 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변에 펜션이 많은데 걔들이 꼭 우리 집에 묵을 필요가 있나요? 일 년에 몇 번이나 온다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자식들이 오면 오는 날 한 끼는 같이 밥을 먹겠지요. 그리고는 제주를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가는 날에 부모님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갈까요?”
“글쎄요. 공항 가는 시간이 쫓길 테니 전화로 간다는 기별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건축주는 대답을 하면서 씁쓸한 느낌을 표정이나 말투에 감추지 못했다. 누구의 자식이라도 요즘은 예의나 효도를 형식이라 여기니 부부만 잘 지내면 된다는 노후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나의 질문이 이어졌다.
“만약에 손주가 제 부모를 따라와서 자식들이 짐을 우리집에 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손주가 어리다면 자식들이 제주에 머무는 동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차지가 될 텐데. 손님방이 없으면 손주와는 언제 친해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건축주가 답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건축주는 다른 땅을 계약했다고 연락이 왔는데 무려 천 평이 넘는 땅이었다. 그는 손주에 대한 나의 얘기에 깊이 공감하면서 집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제주도라는 타지에서 필지에 갇혀 사는 부부의 삶이 어떨지 생각하고는 최소한의 마을을 만들어서 살아야겠다는 판단으로 그 땅을 계약해버렸다는 것이다.
외로운 삶과 아파트, 그리고 단독주택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아파트와 달리 단독주택은 입지여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물론 아파트도 정서적으로는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지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단독주택이 위치하는 곳은 대부분 전원이나 도시의 외곽이기 쉽다. 그러므로 장소가 주는 여건 때문에 외로울 수밖에 없으리라는 명제를 극복해야만 한다.
외로움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팔자라서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넘겨 버릴 수 있을까?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외롭다는 감정이 일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잠깐이나마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을 비우고 밤늦도록 배회하고 있나 보다.
‘단독주택에서 살면 외롭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단독주택에 사니까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라는 답이 될 수 있는 집을 지어야만 근본적인 해결이 된다. 아파트는 그곳에 사는 사람이 외롭기도 하지만 밤이 늦도록 불이 꺼져있으니 집이 더 외롭다. 단독주택에서 어떤 얼개를 가지고 있으면 외로울 틈이 없이 살 수 있는 집이 될 수 있을까?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는 집의 얼개
아파트에서 사는 데 익숙해서 그런지 단독주택을 지으면서도 손님에 대한 배려가 반영되지 않는다. 단독주택에 산다는 건 대부분의 일상을 집에서 보낸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대지가 전원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고 도시의 외곽이라고 하더라도 밖에서 볼 일을 마치는 대로 집으로 돌아온다.
단독주택을 짓는 연령대는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밤늦도록 일을 보는 나이는 아닐 것이다. 평생을 살아온 부부가 아무리 다정하다고 해도 한정된 이웃과의 교분만으로는 외로움을 극복하며 지내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가끔 우리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야만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집’에 찾아드는 손님이 있다는 것이 요즘 세태로 보면 참 희유한 일이다. 자식마저도 집을 나가 살게 되면 부모를 잘 찾지 않는데 웬 손님이 찾아올 수 있을까? 찾아 올 손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파트라는 집의 얼개가 손님이 올 수도, 초대할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집에 손님이 들지 않으면 집의 기氣가 돌지 않아서 흉하다고 했다. 집의 길흉화복을 따지는데 음양의 조화를 중시했다. 집의 얼개를 짜면서 안팎의 경계를 잘 따져서 열고 닫는 구분을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았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양의 기운이 돌게 하는 동기動機가 되니 집 안의 활기를 불어넣게 된다. 손님이 오지 않는 집은 기가 정체되니 음기에 눌려 우울한 분위기가 되고 만다.
정중동靜中動, 운기運氣로 '우리집'의 얼개를 살핀다
부부의 공간을 위주로 하는 단독주택은 아파트와 다름없어 생활의 리듬은 정靜적인 분위기가 될 것이다. 부부만 살다보니 외로울 수 있는 집 분위기에 활기活氣를 더하기 위해서는 어떤 동기動機가 필요하게 된다. 그 동기의 요인이 손님의 방문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손님이 찾아와서 식구들의 일상이 불편하다면 손님도 다시 찾아오기가 망설여지고 주인도 손님을 부르기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손님이 기꺼이 찾아오거나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집의 얼개가 손님이 배려되어 있어야 한다. 요즘은 손님 중의 손님은 뭐니 뭐니 해도 출가한 자식인데 사실은 손주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해서 부모 찾기를 망설인다면 외로움보다 더한 고독한 삶이 되지 않겠는가?
손님의 방문을 배려한 집의 얼개는 세 영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제1의 영역은 안방과 서재로 주인 부부의 공간이다. 제2의 영역은 침실이 최소 둘 이상 갖추어진 손님의 공간이며 제1의 영역과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어야 한다, 제1의 영역은 항상 고요한 분위기가 유지되어야 하며 제2의 영역은 잠깐 묵고 가는 손님이 쓰게 되니 움직임이 활발한 공간이라 할 것이다.
제3의 영역은 거실과 주방으로 제1, 제2의 공간과 연계되어 쓰게 된다. 제3의 영역인 거실 공간은 한옥으로 보면 사랑채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침실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안채와는 독립되어 있어서 늘 손님을 맞아도 가족들의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 부부와 관계된 어떤 손님이 오더라도 일상이 흐트러지지 않는 영역으로 구성을 해야 한다.
출가한 자식이 오더라도 편히 며칠을 묵어갈 수 있는 집, 부부 양쪽이나 어느 한쪽의 벗이라도 편하게 지내다 갈 수 있는 집이면 정중동靜中動의 생기生氣가 흘러넘치게 된다. 부부의 일상은 편안하고 손님이 오면 활기가 더해져서 외롭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