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계약을 하고 난 다음 단계는 집터를 살피고 그 터에 적용된 건축법을 살피는 일이다. 물론 그에 앞서 건축주께서 생각하는 집에 대한 뜻을 잘 받아 챙겨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집터-대지의 조건과 건축법, 건축주의 의견을 조합하고 나면 집의 얼개가 60%에서 70%는 결정된다고 본다.
이 단계에서 건축사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고 잘 정리하면 한두 번의 협의로 바로 실시설계로 진행할 수도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설계가 이렇게 진행되고 계약 후 한 달 정도가 지나면 허가 접수 준비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건축사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을수록 설계에 소요되는 기간은 짧아진다.
그런데 그렇게 진행을 서두르게 되면 불안하지 않을까? 한 달 정도에 집을 짓기 위해 시공자를 물색해야 한다면 이제 배가 항구를 떠나게 된다는 얘기다. 배가 바다에 떠 더 먼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데 항로를 잘못 잡았다며 왈가왈부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 배는 출항 전까지 제반사항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시간을 충분하게 가졌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집터, 대지를 살피다
설계 작업을 시작한 상가주택은 앞서 준공을 마친 발코니하우스 옆 블록에 위치하고 있다. 대지의 크기나 형태는 비슷하지만 주변 조건은 판이하게 다르다. 대지 주변 모습, 비슷한 규모의 상가주택이 다른 외관으로 지어져 있다. 이 다양한 모습 속에 우리 집은 어떻게 지어지게 될까? 집터를 살피는 건 설계에서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가 바로 집 짓는 데 집터이기 때문이다. 일반 캔버스가 아니라 동그란 모양이나 다른 형태도 있고 바탕이 베가 아니라 나무라면 화가의 구상은 그에 맞춰 구도를 달리 잡을 것이다. 집터도 정방형, 장방형, 부정형으로 어떤 형태라고 말 할 수 없는 모양도 있다.
우리 대지처럼 평지에 조성된 택지라면 경사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異形이형에다 경사까지 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다행히 우리 대지는 정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에 모서리가 깎여진 정도라서 평이한 편이다. 지난번에 작업한 발코니하우스와 비슷한 모양새라서 익숙하다 하겠다.
그 다음에 살펴야 하는 건 우리 대지에 向향을 본다. 집터에서 가장 중요한 방위는 말 할 것도 없이 남향이다. 우리 대지는 남향으로 18.5m, 서향에 16.5m가 도로에 접해 있고 동과 북쪽으로 인접대지와 접해 있다. 결국 거실은 남향에 면해야 하고 서향으로 방이 놓일 것이라 예상된다. 북향과 동향으로는 계단실과 중요도가 떨어지는 실이 위치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살펴야 하는 건 조망이다. 우리 대지는 도로로 마주하는 곳에 집이 있으니 따로 고려할 사항은 아니다. 발코니하우스는 서향으로 공원이 있어 조망을 위주로 거실과 주방을 배치했었다. 대지 면적이나 형태가 우리 대지와 발코니하우스가 비슷하지만 조망권의 유무에서 달라서 설계 조건으로 보면 다른 땅이라 하겠다.
법적 제약 조건을 살피다
우리 대지에 적용해야 할 건축법을 잘 살피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특히 정북 방향 일조건 사선제한은 집의 얼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른 법령도 설계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이 택지에만 적용하는 구체적인 지침이 있어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이 택지는 상가주택을 짓도록 각층 용도까지 구체적으로 규정해두고 있다. 주변에 먼저 지어진 상가주택을 보면 일층에는 근린생활시설, 이층에는 다가구주택 네 가구에 삼층에는 단독주택이다. 또 주차장 설치 위치까지 정해져 있어서 출입구와 계단실 자리도 확정된다.
인접대지의 일조권 확보를 위해 정북방향으로 건축물 높이의 절반을 이격해야 한다. 하지만 인접대지경계선에서 1.5미터를 떨어뜨리면 9m높이로 지을 수 있는데 올해 11월이면 집의 높이를 10m까지 지을 수 있게 법이 개정된다고 한다. 각층 높이를 3m에 맞춰 짓다보니 천장 높이 확보에 2.4m로 맞추기도 빠듯했는데 이제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이 정도까지가 집의 배치에 대한 기본적인 법적 제약이며 단열이나 소방 등 구체적인 규정은 모든 건축물에 적용되는 일반 법규 사항이라 보면 되겠다. 법은 규제나 제약이 아니라 건축물의 안전과 건축물의 주변과 도시 환경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너무 지나친 규제로 좋은 집을 짓는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법을 악용하여 私益사익을 채우려고 짓는 집은 이웃에 피해를 주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이런 집에 살고 싶어요
건축주께서 설계자에게 제시한 바람은 너무나 소박했다. 그러나 그 소박한 바람은 설계자의 작업 방향을 잡기 어렵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집에 대한 바람은 HOUSE라는 하드웨어가 아닌 HOME이라는 소프트웨어로 행복한 삶에 대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집에 대해 바람이 절실하지 않으면 ‘아파트가 어때서?’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건축주의 소박한 바람은 아파트에서 사는 편리함이 유지되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단 발코니는 꼭 있었으면 좋겠고 방은 가족 구성상 네 개가 필요하다고 했다. 외부공간은 관리하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두지 않도록 해달라는 말씀으로 소박한 제안을 주셨다.
그리고 안방은 따로 둘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내 생각과 같아서 다행이었다. 방 네 개가 비슷한 크기라서 식구 중에 누가 써도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아이들이 방을 정하고 남은 방이 건축주 부부가 쓰게 될 것이라고 한다.
건축주 분의 이 생각은 아파트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집의 얼개이다. 안방은 오성급 호텔 스위트룸 분위기인데 다른 방은 문간방 위치에 더블베드는커녕 작은 옷장과 책상을 놓으면 비좁은 지경이지 않은가? 아이들이 대학생만 되면 왜 집을 떠나는지 궁금하다면 엄마 아빠가 아이들 방을 써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발코니하우스의 3층 단독주택 평면도-도로가 교차하는 코너에 위치하는 대지의 조건은 같다. 그렇지만 대지 주변의 상황이 다르고 방이 네 개로 발코니하우스보다 하나가 더 들어가야 한다 발코니하우스의 단독주택 내부- 거실 상부는 상부가 열려 있어서 풍부한 공간감이 매력적이다. 아랫층에 외부공간을 둘 여유가 없어 내부 계단으로 다락층에서 옥상에 나갈 수 있게 했다
설계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진행된 이 내용을 ChatGPT에게 주고 설계를 시키면 도면이 바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담하건데 그 도면은 분명 HOUSE일 테고 내가 작업해서 내놓을 결과물은 HOME이 될 수 있도록 애쓴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도면은 2차원 작업이지만 ‘우리집’은 3차원의 공간에 행복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차원을 넘어선 영역이 된다.
설계 과정을 건축주가 바라는 집으로 설명 할 수는 있겠지만 건축사가 창조해내야 하는 ‘우리집’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至難지난한 시간으로 온전한 나만의 産苦산고 끝의 소산이 될 것이다.
도반건축사사무소-대표 건축사 김정관은
집이 행복의 원천이라는 주거의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부산, 양산, 김해, 울산의 단독주택, 상가주택 및 공동주택을 주로 설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