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주가 설계자를 정하는 절차로 여러 곳의 건축사사무소를 방문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 사무소에도 이런 일로 찾아오는 건축주가 적지 않다. 건축에 관한 글을 에세이 형식으로 꾸준하게 써 올리다보니 집짓기 정보 검색에 노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가설계-계획안 작업을 부탁했던 건축주도 우리 사무소를 방문해서 상담을 하고 돌아갔던 분이다. 방문했었던 당시에는 땅을 계약하기 전이라면서 계획안을 받아볼 수 있겠느냐고 얘기했었다. 건축주가 궁금해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었고 우리 사무소에서 작업했던 결과를 보여주었지만 계약 전에 계획안을 작업해 주는 건 어렵다고 얘기했었다.
비용을 지불해 가면서 계획안을 받고 싶은 이유
건축주는 다른 건축사와 계약을 했노라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런데 계획 설계 과정에 작업 결과를 받아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계획안을 부탁할 수 있을지 문의한다고 했다. 물론 계획 설계 과정에 여러 번 안을 다듬어서 결정을 해야겠지만 초기 안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갑갑한 심정이라고 했다.
이런 마음을 얘기하며 건축주가 전화를 넣게 된 건 아마도 우리 사무소를 방문하고 설계에 대한 신뢰를 가졌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추측해 보건데 우리 사무소와 계약을 하지 않았던 건 설계비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이가 많지 않아 보이는 건축주가 지으려고 하는 집은 식구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단독주택인데도 설계비를 아끼려고 하는 건 첫 단추를 잘못 채우는 패착이 아닐 수 없다.
비용을 따로 들여가면서 굳이 우리 사무소에 계획안을 부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무소의 안이 마음에 들면 설계자를 바꾸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계획안을 받아서 그 쪽 사무소에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쨋든 건축주는 우리 사무소를 방문해서 짓고 싶은 집에 대한 설계 지침과 작업 비용을 전달하고 돌아갔다.
건축주가 준비해 온 설계 지침은 지난 번 상담하면서 내가 얘기했던 내용이 중요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건축주도 첫 상담 때 이 땅에 집을 지는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하며 놀랐다고 했다. 그 부분 정도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집에 대한 단편적인 해법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싼 설계비를 조건으로 건축사를 찾아 계약을 하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건축주의 설계지침
대지는 면적이 149㎡로 넓지 않고 남향으로 폭이 6m인 도로에 면하고 있다. 남향에 면해 있다고 하지만 맞은편에 5층 빌라가 있어 겨울이면 그늘이 져서 햇볕을 받기 어려운 조건이다. 그래서 건축주와 첫 상담 자리에서 거실을 3층에 둘 것을 제안했었다.
건축주가 제시하는 설계 조건은 일층은 주차장-캠핑카 1대와 3대가 주차 가능할 것, 현관과 창고, 이층은 안방-욕실(욕조), 드레스룸, 파우더룸, 아이방, 손님방(붙박이장), 공용 욕실(샤워), 3층은 거실(5,5~6m), 주방, 보조주방, 팬트리, 방(컴퓨터, 장난감), 욕실, 다락을 두고 지붕에는 태양광 패널을 설치할 것이 들어 있었다.
거실이 3층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EV를 두는 것을 제안했었는데 이 내용도 설계지침에 들어 있었다. 도심지 단독주택이어서 대지가 넓지 않아 3층으로 짓는 경우에는 꼭 EV를 설치하는 걸 제안하고 있다. 평상시에도 무게가 나가는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힘들고, 다리를 다치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을 염두에 두어야 하니 EV는 꼭 설치하는 게 좋다.
동지에 일조 조건을 검토해 보니 3층에는 햇볕이 충분하게 들 수 있는 것으로 검토되었다. 만약에 이런 일조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고 거실을 이층에 두었다면 햇볕이 필요한 겨울에 그늘이 져서 낭패를 보는 집이 되었을 것이다. 단독주택에서 가장 중요한 자연 환경과의 관계는 겨울에 햇볕이 잘 드는 것이라 하겠다.
건축주 설계 지침에 맞춘 계획안
계획안은 대안을 열 가지 정도 검토하여 그 중에 가장 합리적인 안으로 정리되었다. 정북 방향 일조건 사선 제한으로 건축 가능선을 그어 놓으니 건폐율 60%에 의한 건축 면적에 거의 맞게 앉혀졌다. 전면도로와 막다른 도로 쪽에 면해 실이 남과 서향으로 배치되고 북쪽과 동쪽은 인접대지라 계단과 욕실 등을 두니 기능에 맞는 집이 되었다.
집의 외관을 고려하여 거실은 남북으로 길게 놓았는데 도로면으로 위치한 박공면이 외관 디자인의 포인트가 되었다. 방이 들어가는 이층은 안방에 욕실과 드레스룸, 파우더룸이 여유있게 배치되었다. 안방과 아이방은 크기가 같게 두었고 손님방은 추후에 가족실로 쓸 수 있도록 간막이 벽으로 막았다.
계단실을 제외하면 2층과 3층을 합해 40 평 정도가 된다. 각 실이 여유 있게 구성되어 50평 형대 아파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집이 되었다. 거실의 경사지붕 아래에 둔 다락은 소위 아파트의 알파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공간이라 하겠다.
계획안으로 제안하는 1안과 대비되는 2안도 제시했다. 모델링으로 정리된 1안과 다른 2안은 거실과 주방이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되어 전면도로로 배치되어 있다. 외관의 상징성은 1안에 비해 떨어지지만 발코니가 설치되어 공간의 쓰임새에서 장점이 돋보이는 안이다.
계획안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건축주는 계획안을 보고 설계 지침에 맞게 작업되어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이 계획안은 아파트의 얼개를 반영하여 사적 영역이 2층, 공적 영역이 3층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면 되겠다.
만약에 계약이 되어 설계자로 작업을 하게 된다면 아파트와 다른 단독주택만의 특성을 살린 독특한 설계안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짓는 집은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형으로 우리집만의 특징이 돋보여야 할 것이다.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그 집이 우리 식구의 삶을 만든다는 걸 생각하면 어떤 집에서 사는 게 좋을까?
건축주는 이 계획안을 이미 계약한 건축사에게 전달해서 설계를 계속 진행할지도 모른다. 빌딩 타입 단독주택이라 할지라도 외부 공간-마당을 적극적으로 쓸 수 있어서 전원주택이 부럽지 않은 우리집에서 살 수 있는데 참 안타깝다. 내 머리 속에는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건축주 식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이 들어 있지만 선택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