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대가를 지불하고 의뢰했던 계획안을 받아갔던 건축주는 결국 연락이 없다. 아마도 계약했던 건축사와 우리 계획안으로 설계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가 보다. 계획안을 전달하면서 건축주의 설계지침을 그대로 도면으로 옮겼을 뿐이라고 얘기를 했었다.
그 말은 이 계획안에는 나의 건축 의도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건축주가 제시한 지침은 아파트 평면과 다름없는 집이 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한 층에 들어갈 실들을 두 개층으로 나누어서 충실하게 구성했을 뿐이다.
첫 상담에서 나누었던 얘기
어느 대지이든 불리한 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이 대지는 남향으로 도로에 면해 있지만 건너편에 5층 연립주택이 있어 겨울에는 햇볕이 들지 않는다. 단독주택에 살면서 겨울 햇볕이 들지 않으면 안락한 주거 여건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이러한 여건을 타개할 수 있는 묘책을 그날 얘기하면 안 되는 데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동안 우리 사무소를 방문했던 건축주들에게도 늘 그렇게 해 온 게 사실이다. 이 대지는 겨울에 집으로 햇볕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만 얘기하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고만 했어야 현명한 대처였을 것이다.
겨울에 그늘지는 땅인데 어떤 재주가 있어 햇볕이 집안을 가득 채울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 팁이야 말로 건축주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고 두 번째 만남에서 얘기했었다. 그런데 그런 묘책을 내놓을 수 있는 건축사라면 믿음이 갈 테니 계약을 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건축주라면 당연히 그런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고 속없이 얘길 했었다. 그런데 건축주는 정보만 챙겨가고 계약은 아마도 설계비를 싸게 부른 건축사와 했던 것 같다. 사실 그 묘책이 큰 그림에서 보면 아주 중요하지만 세세하게 챙겨야 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르니 안타까운 일이다.
전달된 계획안을 평가해 보면
첫 상담 때 내가 건축주에게 제시했던 묘책은 거실을 3층에 두자는 것이었다. 동지 기준으로 일사각을 검토해 보니 3층에 거실을 두니 햇볕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낮에 쓰는 거실과 주방을 3층에 두고, 침실은 밤에 쓰는 공간이니 2층에 두어도 집을 쓰는데 지장이 없다.
2층에는 방이 세 개 들어가는데 방은 전면도로와 서쪽의 막다른 도로에 면하도록 배치했다. 인접대지 쪽으로는 계단실과 욕실을 두어 옆집과 프라이버시에 대해 시비가 없도록 했다. 현관은 일층에 있어 실내에는 신발을 벗고 다니게 된다.
좌-3층 평면도, 우 2층 평면도
다락은 거실 상부에 두었는데 거실 면적의 절반 가까이 쓸 수 있겠다. 다락은 수납 및 서재 등 다목적실로 사용할 수 있으니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공간이 된다. 다락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출입을 할 수 있다.
이 정도 평면이면 여느 아파트와 비교해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공용공간과 사적 공간이 구분되어 손님이 밤늦은 시간까지 머물러도 부담이 없겠다. 음악 감상이나 대형스크린으로 박진감 넘치는 음향으로 영화를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점으로 봐도 아파트와 차별되는 주거생활을 누릴 수 있다.
그렇지만 단독주택으로는 부족한 안
건축주에게 전달한 이 계획안은 건축주의 지침을 적용했다고 앞서 언급했다. 이 안에는 건축사로서 제시할 나의 의지는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어떤 조건이라고 할지라도 단독주택은 아파트와 완전히 차별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단독주택 작업 의지이다.
박스 안에 갇혀 사는 집이 아파트인데 이 계획안도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외부 공간이 없는 단독주택에서 지내는 생활은 갑갑하기 그지없다. 작은 마당이라도 가질 수 있어야만 안팎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주거 일상을 만들 수 있다.
필자 설계 울산 다가구주택 원명재의 4층에 있는 단독주택 마당
필자 설계-부산 에코델타시티 상가주택 이안정 3층 단독주택에 있는 마당
실내 공간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결국 내부 공간일 뿐이다. 거실과 식탁이 마당과 이어지는 집을 떠올려야 우리 식구가 살고픈 단독주택이라 할 수 있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제안할 수 있는데 건축주는 설계비를 아낀 대가가 얼마나 아쉬운 지 모르고 집을 짓고 말겠다.
그 밖에도 내부 공간에서도 소소한 부분까지 여러 가지 대안을 검토하며 결정을 해야 한다. 안마다 장단점이 있으니 대안을 놓고 더 좋은 결론을 찾아야 한다. 공사비와 지가를 포함한 집을 짓는 비용에서 설계비가 차지하는 비용은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게 참 안타깝다.
아전인수 격인 글로 읽힐 수 있지만 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집 짓기는 그대로 실패가 되고 만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짓는 집을 설계비를 아끼는 걸로 시작하니 그야말로 사상누각을 짓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부디 이 계획안을 잘 다듬어서 건축주의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지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