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없다. 나도 그렇지만 동료 건축사는 이 시국을 어떻게 버텨내고 있을까? 건축허가를 받아 놓은 일도 착공을 미루고 있으니 새 일감이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다. 언제쯤 이 어려운 국면이 해소되어 새 일을 맡을 수 있을까?
유명 건설회사 부도 소식이 연이어 뉴스에 나오고 있다. 우리 건축사가 일이 없으니 건설회사가 시공할 일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뿐 아니라 시공 중인 현장도 공사비 상승과 건설 관련 금융 환경 악화로 공사가 중지되는 곳도 늘고 있다.
일은 귀하고 건축사는 넘치고
일은 귀하고 일을 해야 할 건축사는 많으니 설계비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바람도 요원하게 느껴진다. 지난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선거에서 민간 건축 설계 대가를 법제화하겠다고 후보 세 사람이 다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내세웠었다. 그런데 민간 설계 대가가 법제화된다고 해도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까?
일은 갈수록 귀해져 수주 경쟁이 치열해지니 일할 수 있는 설계비는 제시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설계비가 정해져 있는 공공 건축 수주에 목을 매고 설계 경기에 참여하는 건축사가 부지기수로 늘고 있다. 설계 경기 심사 뒤에 좋지 않은 얘기가 나오지만 목숨 줄이 걸린 시국에 공정한 경쟁 운운하는 건 배부른 소리라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공공건축물을 수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입찰인데 제시된 설계대가와 업무 범위가 요상하다. 입찰 조건을 잘 살피지 않으면 수주를 해도 일을 하면서 낭패를 보게 된다. 업무 범위에 설계에 필요한 온갖 일이 다 설계대가에 포함되어 있어서 적자를 보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하는 얘기가 적지 않다.
공공건축물 설계 수주를 해도
공공건축물 설계를 설계경기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수주했다고 해도 각종 심의 등 행정 업무를 수행하고 나면 설계 공기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늘어난 공기로 인해 설계 원가를 잠식당하는 건 제쳐두고 건축사가 주도적으로 설계 과정을 끌고 가는 게 너무 어렵다. 배가 산으로 가고 있는 건 그렇다 쳐도 어느 산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이다.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해도 목적지에 도달시켜야 한다는 책임을 지는 건 딱 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은 건축사일 수밖에 없는데 수많은 사공들에게 시달려 제시간에 맞추지 못했거나 목적지가 아닌 곳에 닿으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설계를 진행하면서 권리는 없고 책임만 져야 하는 건축사의 처지는 꿀 먹은 벙어리 신세나 다름없지 않은가?
공공건축물을 설계경기로 설계자를 선정하고 있는데 불후의 명작은 그만두고라도 작품이 될 건축물이 나오고 있을까? 설계자의 의지가 존중되지 못하는 작업 여건에서 당선된 원안이 지켜지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공공건축물은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어야 하는데 건축사가 설계 과정을 주도하지 못하니 작품이 나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도시의 백년지대계를 건축사에게
일이 없다고 아우성이지만 일을 한다고 해도 말 못 할 고충에 시달리는 건축사의 활로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대학 정원을 늘리겠다는 정부와 맞대응을 하고 있는 의사들의 고충은 우리 건축사의 그것과는 방향이 다르다. 의사 수가 늘면 제대로 된 진료를 볼 수 없어 의료의 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도시의 미래를 위한 백년지대계라는 건축물을 짓는 일의 최고전문가인 건축사가 이런 고충 속에 도시 경쟁력에 얼마나 책임을 다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30년 전의 설계대가로 일을 하고 있는 건축사에게 도시의 백년지대계를 맡기는 정부는 제정신인가 묻고 싶다. 건축물의 설계와 감리, 유지보수 및 해체까지를 책임질 수 있는 전문가는 건축사 밖에 없다. 어떻게 집을 짓는다고 해도 지어지고 난 건축물이 도시의 얼굴이 되고 미래 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도시 경쟁력을 결정하는 건축물의 전문가들이 해야 할 중차대한 일을 호구지책에 연연하며 하고 있는데 이를 대책 없이 두고만 봐서 되겠는가?
공공건축물이나 민간건축물을 구분할 것 없이 건축사가 책임을 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수도권 이외 지역의 도시 경쟁력 역화를 우려하는 시대에 건축사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도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 나가는 일의 중심에 건축사가 있어야 하며 업무를 능동적으로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공공건축물이나 민간건축물 구분 없이 건축사가 책임지고 일할 수 있도록 법정 설계 대가를 서둘러 정해주기를 바란다. 시공 감리나 해체공사 감리 업무 대가는 법으로 정해 업무 환경이 개선되었지만 더 중요한 설계 대가는 방치되고 있는 형편이 너무 안타깝다. 민간건축물 설계 대가가 하루 바삐 법제화되길 바라고 그 시행도 꼭 법으로 규정해서 지켜질 수 있도록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