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주택 짓고 후회할 열 가지 - 백년가百年家를 보장하는 처마 이야기
그동안 쉰 채가 넘는 단독주택을 설계해 오면서 단 한 채도 경사지붕을 벗겨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설계한 집의 외관은 지붕 때문에 거의 비슷비슷해서 독창적인 모습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경사지붕만 포기한다면 외관 디자인이 자유를 얻게 되는데 나는 왜 꼭 지붕 있는 집을 고집하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딱 한 가지, 지붕이 집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경사 지붕 끝으로 빠져나온 처마는 비를 그어 외관이 늘 온전할 수 있게 해 주고 차양 역할을 통해 뜨거운 여름 햇볕이 집 안으로 드는 걸 막아준다. 또한 실내에서도 적정한 높이의 공간감을 가질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지붕 하부의 다락은 충분한 수납공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집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지역을 막론하고 거의 다 경사지붕을 가지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집을 지을 때 그 지역에서 수급할 수 있는 재료를 써서 기후 조건에 맞게 지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에서 지붕은 집이 유지될 수 있는 절대적인 구성요소가 되었다.
목조로 지은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에 지어져 지금까지도 전각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조선시대에 지었던 한옥도 수백 년의 세월을 이겨내면서 당당하게 지금에 이르고 있는 비결은 다름 아닌 경사지붕과 처마 덕분인 것이다. 목조로 짓는 집은 습기에 의한 구조체의 손상을 염려해야 하므로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치로 두었던 것이 바로 긴 처마이다.
건축에서 근대와 현대를 구분 짓는 사건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등장이라 하겠다. 철근콘크리트를 재료로 집을 짓게 되면서 경사지붕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기후적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골조의 등장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동일한 처지와 입장에서 집을 지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철근콘크리트로 짓는 집에다 그토록 경사지붕과 처마를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외관 디자인이 눈에 띄는 집
근래에 단독주택 신축 붐이 일고 있다. 도심을 조금 벗어나면 곳곳에 새로 지은 단독주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존 마을에 새로 지은 집이 한두 채 보이기도 하지만 택지를 조성해서 수십 채가 한꺼번에 지어지기도 한다. 남다르게 지어서 살아보려는 집주인의 바람도 있겠지만 설계자의 작품에 대한 의욕이 넘쳐 보이는 독특한 외관을 가진 집도 많이 볼 수 있다.
외부 마감도 다양해져서 노출 콘크리트로 지붕에서 외벽까지 마감하기도 하고 시멘트 벽돌을 외장재로 쓰기도 한다. 처마가 없는 경사진 지붕에 천창을 내기도 하는 등 외관이 눈에 띄는 단독주택은 마을의 볼거리가 되어준다. 사람도 집도 예쁘면 다 용서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엄격한 조영 지침造營指針을 적용해서 지었던 옛집에 비한다면 요즘 집 짓기는 자유를 넘어 방종이나 일탈이라고 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집이라 해도 한번 지어지면 최소 수십 년을 써야 하는 데 과연 지금이라고 해서 조영造營 기준 없이 막지어도 되는 것일까? 어떻게 지어도 몇 년 정도는 그냥저냥 살아질지는 모르지만 이십 년, 삼십 년이 지나면 처음 지었던 상태가 어떻게 될지 예측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한옥은 백 년 정도는 새 집처럼 쓰고 이삼백 년이 되었는데도 후손들이 손을 봐 가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지어지고 있는 집은 백 년이 아니라 이삼십 년만 지나도 오래된 집으로 치부되고 있다. 외관 디자인이 멋진 집이라며 SNS에 올라오는 집을 보면서 비와 바람을 맞으며 어떻게 변화될지 내 집을 짓기 전에 꼭 짚어봐야 할 일이다.
경사지붕은 선택이지만 처마는 필수
평지붕이든 경사지붕이든 일 미터 정도 처마를 뽑아내는 건 단독주택에서 포기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다. 집이 처음 지어졌을 때의 상태로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비나 대기 중의 먼지로 인해 외벽이 오염되고 창문 주위로 새는 빗물, 옥상방수에 문제가 생겨 누수가 되기 시작하면 안락한 삶을 보장하기 어려워진다.
집이 준공되었을 그때는 멋진 외관에 만족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생겨나는 문제점은 집주인이 떠안고 살아야 할 고통이 된다. 집을 짓고 나서 바로 생기는 하자는 시공자가 손을 봐주겠지만 더 세월이 지나면 집주인의 몫이다. 집을 쓰다 보면 사소하게 고칠 일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외관은 오염이나 누수가 집의 디자인과 재료에 따라 차이가 많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즘 시골에서 오래된 평지붕 단독주택에 경사지붕을 덧씌우는 공사를 많이 하고 있다. 단열을 하지 않고 지었던 탓도 있지만 평지붕의 방수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래전에 지었던 단독주택은 대부분 처마를 가지고 있어서 외벽에서 생기는 문제는 거의 없다.
처마 없이 짓는 평지붕 집에서 남쪽은 뜨거운 햇볕을 가릴 수 없고 북쪽 벽은 습기가 잘 마르지 않아서 이끼가 끼는 등 외장재 오염을 피하기 어렵다. 창문 주변으로 새어드는 빗물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발생되는 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된다. 여름의 장마철은 집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는 시기가 된다.
처마 없이 경사지붕과 외벽이 이어진 집은 앞에서 얘기한 여러 가지 문제가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경사 지붕으로 내리는 빗물이 온전히 벽으로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폭우가 쏟아지면 엄청난 양의 물이 외벽으로 쏟아져 내릴 텐데 벽면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경사 지붕은 디자인으로 채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나 처마는 무조건 두어야 한다. 집이 지어지기 전에 완성된 도면을 모델링으로 시뮬레이션해보면서 십 년이 아니라 오십 년이 지나도 온전하게 쓸 수 있을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집은 쓰다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버리거나 바꿔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년가百年家를 내다보고 지어야 하는 집
집을 백 년을 내다보고 지어야 한다는 생각은 무리일까? 백 년을 보장할 수 없는 집은 십 년 뒤에 문제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목조로 지었던 조선시대 한옥이 수백 년을 버텨내고 봉정사 극락전은 지어진지 천년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시대의 집은 왜 백 년도 장담하기 어렵다고 하니 왜 그럴까?
단독주택을 목조로 짓는 게 대세가 되고 있다. 일층 바닥을 제대로 높이지도 않고 처마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집을 목조로 짓는다면 우리 기후에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외관에 치우쳐 디자인을 과다하게 적용한 설계에다 공사비는 값싸게 지으려고 하는 건 사상누각沙上樓閣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어떻게 지어도 멋진 외관만 자랑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말과 겹쳐져 다가온다. 외모만 보고 배우자로 선택했다가는 한 평생 후회하게 되는 것처럼 외관만 멋진 집을 지었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 자식에게도 물려가며 살 수 있는 백년가로 지을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 처마에 있음을 꼭 당부하고 싶다.
내가 쉰 채 넘게 단독주택을 설계해 오면서 처마 신봉자가 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자면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경사지붕을 벗겨내기만 하면 독특하고 별난 디자인을 할 수 있는데도 평범해 보이는 외관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가끔 내가 작업한 집을 찾았을 때 건축주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이보다 더 큰 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디자인 위주로 지은 집이나 외모가 멋진 배우자보다 오래 같이 살아도 좋을 집이나 배우자라는 확신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단독주택을 지으려고 생각하는 분들은 다른 건 몰라도 처마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걸 잊지 않길 바란다. 겉모습보다 속내를 잘 살펴야 하는 게 집이나 배우자와 백년지기로 살아도 걱정 없는 꿀팁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