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을 '지금'으로 끌어당기기

by lemon LA


"다 낫거든, 상황이 다 좋아지면 나중에, 그때 잘해줘."

큰언니는 겨우 딸기 한 팩을 사 온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K장녀라는 말은 한국에만 있을 것이다. 장녀와 장남이 태어나면서 갖는 책임과 무게들.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닐 텐데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들었던 말들 때문에 평생 그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산다.


"너는 장녀(장남)니까"


장녀니까, 장남이니까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하고, 공부를 잘해야 하고, 뭐든 모범을 보여야 하고, 부모님 말씀을 최고로 잘 들어야 하고, 부모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자리도 대신해야 하고, 뭐든 양보해야 하고…….


어린 시절 내가 본 큰 언니도 그랬다. 늘 앞장서고, 동생들을 돌보고, 양보하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도 하고, 부단히 열심히 살았다.


지금도 그렇다.


미국으로 이민 가 병들어 돌아온 나에게 엄마 없는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선뜻 나를 돌봐주겠다며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남편은 미국에서 아이를 돌보고, 혼자 암투병을 하기 위해 한국 큰언니 집으로 돌아와 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젠 항암치료도 끝났고 혼자 운동하고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나았다.


며칠 전,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를 지나는데 딸기가 눈에 띄었다. 큰언니는 과일 중에 딸기를 가장 좋아한다. 자연스럽게 슈퍼에 들어가 딸기 한 팩을 샀다. 그걸 사는 순간 언니가 미소 지을 생각에 기뻤다.


근데 큰언니는 내 예상과 달리 막상 딸기를 보더니 기뻐하기보다 역정을 냈다.


"병원비도 많이 들어서 힘들 텐데 이런 거 안 사 와도 돼. 나중에, 나중에 몸도 튼튼해지고 상황이 다 좋아지면 그때 사 와도 돼." 한다. 암투병하는 동안 고액의 치료비와 병원비를 지불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것이었다.


"언니 나중은 없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알게 된 건, '나중'이란 시간이 올지 안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지금이란 시간이 주어졌을 때 '지금' 잘해야 돼. 그게 내가 알게 된 거야."


정말 그랬다.

중요한 일들, 감사한 일들을 '나중'으로 미루며 살았는지 모른다. 특별하게 고마운 일들을 나중에 갚으려고 했고, '나중에 잘하면 되겠지'라고 미룬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신이 나에게 허락한 시간은 '지금'뿐이다.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른다.

'나중'이란 시간을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지 아프면서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가진 전부라는 것을,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것을,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도 늦지 않다는 것을,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며 겨우 배웠다.


'지금'에 집중하다 보니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에 외롭게 혼자 남아 아이를 돌보는 남편도, 엄마 없이 불안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사는 아이도, 말없이 늘 기도하는 시부모님도, 정성껏 나를 돌봐주는 큰언니 가족도, 위로와 격려를 늘 보내주는 친구들도…….


이 세상에 참된 위로를 안고 살고 있었던 것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픔은 마음의 흐린 시력을 선명하게 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

꽤 괜찮다.


마음의 행복은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싹이 트기 시작했다.



"네가 가진 것으로,
네가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시어도어 루즈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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