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 프랑크의 글쓰기 수업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안네 프랑크-
초등학교 시절, 가장 싫었던 숙제는 일기 쓰기였다. 매일 특별한 일도 없는데 그날의 일들을 그림까지 그리면서 적는 게 귀찮게만 여겨졌다. 그래도 숙제니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것들만 적어서 매일 검사를 받았는데 방학에는 검사를 하는 선생님이 없으니 일기장은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그러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면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일기장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밀린 일기를 쓰자니 벅차고 안 하자니 선생님께 혼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울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엄마는 큰언니에게 숙제를 해갈 수 있도록 일기장을 보여주라고 권했다. 큰언니는 자신의 일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지만 동생이 숙제를 못해가면 선생님께 혼날게 뻔하니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나에게 자신의 일기장을 내주었다. 나는 그 일기장을 받아 이삼일 정도 시간을 들여 베껴댔다. 옮겨 적다가 손목이 아프다고 징징대면 나머지 부분을 큰언니는 방바닥에 엎드려 메꾸어 주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나에게 일기란, 큰언니의 일상을 필사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가 우연히 <안네의 일기>를 접하게 되었다. 13살이 된 나는 똑같은 나이에 쓴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몹시 궁금했다.
<안네의 일기>는 13세의 생일 선물로 받은 일기장에서 시작된다. 때는 1942년 6월 12일 그녀의 생일. 그녀는 1929년 6월 12일생이니 정확히 13세가 되는 나이였다. 안네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계 독일인으로 1933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정책이 시작되면서 안네의 집안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한다. 안네의 일기가 쓰인 기간은 나치가 네덜란드까지 점령하고 유대인을 색출해 수용소로 끌고 가던 바로 그때부터 1944년 8월 4일 나치의 비밀경찰에 안네 가족의 은신처가 발각될 때까지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의 기록이다.
안네의 일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쓰였다. 자신의 일기장을 '키티'라고 부르며 인격화해 마치 일기장 안에 누군가 살아있는 것처럼 자신의 두려움, 괴로움, 첫사랑, 사춘기 소녀의 고민, 불평, 일상을 털어놓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마치 가장 믿고 의지하는 베스트프렌드에게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진솔하게 얘기하듯 일기를 써 내려간다.
언제 죽게 될지 모르는 극단의 공포 속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감옥과 같은 은둔생활 속에서, 처절한 절망 속에서 일기라는 글쓰기로 영혼에 호흡을 불어넣는 안네 프랑크. 그녀는 글쓰기 안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자유를 만끽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준다. 갇힌 것은 몸이지 우리의 영혼은 얼마든지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결국 안네 프랑크는 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1945년 3월경에 사망하고 만다. 그녀의 나이 겨우 16세였다. 안타깝게도 영국군에 의해 수용소 사람들이 구출되기 한 달 전쯤이었다. 그 후, 은신처에 버려져 있던 그녀의 일기는 가족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버지에 의해 발견되어 출판된다. 이 책은 첫 출판 이후 전 세계 50여 개국, 60년에 걸친 최장기 최대 부수 판매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라는 안네가 쓴 글처럼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일기는 지금도 독자들에게 감동과 희망, 회복력, 공감, 관용이라는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을 담은 문화유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13살에 쓰인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13살이었던 나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쓸모없는 글쓰기로 여겨졌던 일기가 '위대한 글쓰기'로 둔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고작 일기, 겨우 일기, 일기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할까 생각했는데 무지한 생각이었다. 글은 누군가의 영혼의 울림이고 누군가의 희망이며 누군가의 사랑, 삶의 기록이다. 그것을 읽는 순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가상의 문이 열려 우리를 연결시켜 주고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도 한다.
때론, 글쓰기를 하면서 희망을 갖다가도 절망을 하기도 하고, 지속하다가도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글쓰기를 하면서 목적을 세웠다가도 어느새 허물어 버리기도 하고 다시 뜨거운 마음을 가졌다가 식어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지속하면 깊은 곳으로 향할 수 있다.
글쓰기? 글쓰기! 글... 쓰... 기......
안네의 일기가 세기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듯이, 오늘 기록하는 누군가의 일기도 세기의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 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배운다. 안네 프랑크 선배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