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시카고의 바람, 샌프란의 안개, 시애틀의 가을

by Kyle

이곳 라스베이거스도 이제는 만연한 가을의 한가운데에 들어온 듯합니다. 밤이 되어도 도통 식을 줄을 모르던 대지는 이제 아침저녁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산책과 야외 활동하기 좋은 날씨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짧디짧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조금은 쌀쌀해지겠지만 그전까지 이 좋은 날씨를 충분히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아내의 출산이 다가오면서 아마도 당분간은 마지막이 될 듯한 한인 마트 투어를 위해 잠시 LA를 다녀왔습니다. 큰 규모의 한인 마트가 하나밖에 되지 않는 라스베이거스에 비해 남가주도 나성시라 불리기도 하는 LA는 그 이름만큼이나 규모가 큰 한인 마트가 많아 이사 후에도 종종 필요한 물건을 사러 방문하고는 했습니다. 특히 한국산 쌀의 경우는 항상 있는 것도 아니라서 여러 개의 마트를 돌아다녀야 해서 보통은 쌀 구매가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곤 합니다. 그리고 이번 LA 방문에는 또 다른 숨겨진 목표가 하나 있었는데, 혹시 모를 캘리포니아로의 복귀를 위한 동네 탐방이었습니다.


사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여정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라스베이거스의 이주는 저렴한 세금을 기반으로 한 경제적인 목적성이 가장 강했던 결정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목표를 달성한 이후를 늘 생각하고 있기도 했지만, 새 식구의 등장이 이러한 생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너무나 건조하고 더운 기후와 상대적으로는 아쉬운 교육 환경 등이 결국 저희가 추구하는 우선순위에 큰 변화를 불러온 탓이겠지요. 그래서 이주(移州)를 한지 이제 불과 1년 남짓이 지났을 뿐인데 또 새로운 곳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시카고의 호수 바람도, 샌프란시스코의 언덕들도, 시애틀의 단풍으로 물든 가을 풍경도 모두 그 여정의 일부였습니다.



그 첫 목적지는 시카고였습니다. 마치 바다와도 같이 넓은 미시간호와, 호수로부터 이어진 강을 따라 높게 솟아있는 마천루들이 반겨주었습니다. 물과 바람, 그리고 다양한 건물들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역마살처럼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우리 부부의 마음을 다시금 자극한 첫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임신 소식을 알기 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여행이었지만, 막상 떠나던 날은 너무나도 많은 생각들로 마음속이 복잡한 날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임신과 그로 인해 바뀌어야만 하는 수많은 계획, 지금의 생활 방식과 거주지까지 모두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불안감까지, 어찌 보면 부정적인 생각들만 한가득 안고 비행기에 올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게 될 변화들이 단지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모습의 삶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 말입니다.


시카고는 아직도 종종 ‘미국 제2의 도시’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인구나 경제 규모 면에서 이미 LA에 밀려난 지는 오래지만, 도시에 깃든 자부심만큼은 LA의 그것보다는 더 강렬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거대한 시카고 대화재로 삶의 터전의 3분의 1이 잿더미가 되었던 도시가, 지금은 건축가들에게 ‘건축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마천루로 가득 찬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 도시를 바라보고 있자면, 이곳 사람들의 자부심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던 도시의 이야기는, 막막하게만 보이는 우리의 새로운 삶도 그저 걱정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모습의 우리를 위한 하나의 과정일 수 있다는 조용한 용기처럼 다가왔습니다.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마천루들이 미시간호와 강이라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모습이, 그리고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의 내음이, 자연과 도시가 조용히 화음을 맞춰 노래하는 것 같은 장면처럼 오래도록 인상에 남았습니다. 그래서일까 ‘윈디 시티’라는 별칭이 조금은 또 색다르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시카고의 묵직하지만, 리드미컬한 바람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해무에 둘러싸인 몽환적인 바닷바람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였습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이민의 시작점을 함께한 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높은 세금과 물가로 인해서 떠나온 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까닭은 익숙함과 안정감이겠지요. 미국 서부에서 가장 많은 이민자가 모여 사는 곳 캘리포니아, 그중에서도 실리콘밸리는 우리 부부 같은 IT 이민자들에게, 문화적으로도 커리어 측면에서도 안도감을 주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아시아 비율이 높다는 점은 타지에서 언제나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 가족에게는 분명 큰 메리트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과도한 경쟁과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불안정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성인들뿐 아니라 아이들도 미국판 스카이캐슬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만큼 치열한 학군 경쟁 속에서 지내야 하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우리 부부의 양육관이라고 한다면, “사회에서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에 가깝습니다. 똑똑하고 총명하거나 재능이 특출난 아이가 되는 것이 싫다기보다는, 그것들에 너무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래도 둘 다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고 익혀야 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보니, 정작 아이에게는 공부를 잘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보다는 상식이 통하는 사람, 스스로가 특출난 사람보다는 무언가를 보는 안목이 좋은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곳의 경쟁적인 기대치와 하루하루 급변하는 분위기가 과연 우리가 바라는 삶과 잘 어울릴지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가 방문한 7월의 샌프란시스코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강렬한 햇살을 막아주는 해무의 덕에 선선한 가을 날씨와도 같았습니다. 안개로 자욱한 금문교를 바라보면서 마치 우리가 지금 저 다리의 출발점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욱한 안개로 한 치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막막함. 그럼에도 안개가 걷힌 후 우리가 건넌 금문교를 돌아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바다와 도시의 모습이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과 확신.



안개 낀 금문교를 지나 도착한 곳은 가을 내음이 가득한 시애틀이었습니다. 시애틀 북쪽, 캐나다와 맞닿아있는 작은 도시 벨링햄에 도착했을 때의 첫 느낌은 가을, 그 자체였습니다. 기분 좋게 차가운 공기와 고소한 커피의 향기, 그리고 기차 창문을 통해 보이는 푸른 바다의 모습들이 문득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주는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애틀과 샌프란시스코는 둘 다 바닷가에 위치한 도시임에도 매우 다른 인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가 부산스럽고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워커홀릭을 닮았다면, 시애틀은 바다에 나아간 누군가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 같은 도시였습니다.


스타벅스의 도시에 걸맞게 도시 곳곳에는 커피 향이 퍼지고 있었고, 바닷가를 따라 펼쳐진 잘 정돈된 거리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가족들의 모습들로 분주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떠올린 도시이기도 합니다. 아이와 손잡고 길을 걷고, 구경하고, 주전부리를 하며, 사진을 찍고 보내는, 그냥 평범하고 평화로운 어느 주말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막연하게 아이가 태어나고 이제 새로운 인생의 막을 열어야 한다고 머리로만 생각할 뿐 그 순간까지도 진짜 실감을 못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애틀의 부둣가를 아내와 함께 조용히 걸으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가족의 삶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로 삶의 보금자리를 찾고 결정하면서 날씨와 치안, 아이들이 다닐 학교와 동네 분위기, 주변 이웃과 한인 상권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조건을 따지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가족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이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조건을 따져서 심사숙고한 그곳이 때로는 우리와 맞지 않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갑작스러운 가족 구성원의 변경이나 생각하지 못했던 날씨의 문제들, 때로는 뜻하지 않은 이직처럼, 실제 삶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을 너무도 쉽게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득문득 완벽한 장소라는 것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어쩌면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로 정했고, 어떻게 그곳에서의 삶을 이루어가는 것이겠지요. 몇 개월에 걸쳐서 여러 도시를 둘러보면서 보금자리를 바라보는 생각과 기준이 조용히, 그러나 어찌 보면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성격을 보면 다시 객관적인 지표들을 세세히 따져가면서 아이와 함께 할 도시를 정하겠지요. 그럼에도 이 방황과 깨달음의 기록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디로 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 고민이 우리의 삶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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