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잭팟
작열하는 태양이 모든 것을 태울 듯한 위용을 뽐내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잠시 비워두었던 지난 두 달여의 시간은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훌쩍 떠났던 시카고에서 만난 자연과 도시의 잘 정돈된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하고, 잠시 머리를 식히러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사이 회사에서는 난데없는 레이오프의 칼바람이 불어닥치는 등 온갖 일들이 가득했던 지난여름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랍고 강렬했던 것은 역시나 갑작스레 찾아온 새 생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형적인 난임부부이자 본격적인 딩크족의 인생을 계획했었던 우리 부부에게 임신테스트기에 표시된 빨간 두 줄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을 총동원하더라도 표현이 되지 않는 새로운 감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대한 당혹감, 기존의 인생 계획을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불안함, 난임이라 자연임신의 확률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에 대한 배신감(?), 우리가 한 생명을 잘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 그리고 축복과 환희보다는 이런 감정이 먼저 들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까지. 지금은 그때와 같이 요동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많이 줄었습니다만, 그 자리에는 또 다른 형태의 무수히 많은 걱정과 줄어드는 걱정만큼 새롭게 생기는 기대와 기쁨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혼돈에 가까웠던 감정의 폭주는 생각하지 못했던 잔여물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어떠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고, 경험해 왔고, 표현해 왔는지에 대해 모든 것들을 동원해야 하다 보니 오히려 정리가 되는 기분이랄까요. 그리고 나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표현하기보다 억누르려 했었는지에 대해 자각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형태의 감정들을 느끼고 살펴보면서 그동안 경험하고 느껴왔던 많은 일들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그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불현듯 과거 X가 트위터이던 시절 화제가 되었던 한 일본인 트위터리안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공부란 '머릿속에 지식을 쑤셔 넣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의 해상도를 올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뉴스의 배경음악에 불과했던 나스닥 평균 지수가 의미를 지닌 숫자가 되거나
외국인 관광객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거나
단순한 가로수가 '개화 시기를 맞이한 배롱나무'가 되기도 한다.
이 '해상도 업그레이드 감'을 즐기는 사람은 강하다.
@toyomane
지식만이 아니리 감정 또한 그렇지 않을까요. 다만, 공부와 지식이 삶의 해상도를 올리는 행위라고 한다면, 다양한 경험, 그중에서도 특히나 감정적으로 큰 울림이 있는 경험들은 삶을 표현하는 색의 스펙트럼을 더 넓혀준다는 느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요즘은 하루하루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를 다니면서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양가 부모님의 환호와 축하에 어리둥절하기도 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고 있구나를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새로운 삶의 계획들을 다시 세우고 있습니다. 그간의 계획들이 모두 우리 부부와 반려묘 짜장이를 위한 것들이었다면, 이제는 네 식구를 위해 모든 것을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차차 겪어나가게 될 또 다른 새로운 경험들과 감정들이 또 우리에게 어떠한 세상을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감들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아이의 태명은 잭팟으로 정했습니다. 카지노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생긴 아주 희박한(예전 난임 전문 산부인과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확률을 뚫고 찾아온 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정말 예기치 못했던 행운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아이의 탄생과 함께 아마 앞으로 제가 전하는 이야기들도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일곱 색깔의 아름다운 무지개색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부부의 삶도 잭팟이라는 아이의 프리즘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색깔의 감정과 경험들로 채워지겠지요. 그러면 또 그러한 새로움을 글자라는 도구를 통해 차근차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