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국제영화제 수상을 축하하며
2020년 2월 9일. 미국에서 열린 오스카 수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이름이 연달아 호명됐다. 그리고 수상 이후 최근 요 몇일이 내가 살아가면서 '봉'이라는 나의 성이 가장 많이 불린 날일 것이다.
때는 2000년 2월,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날,
우리 네 식구는 우리가족 역사상 처음으로 '다 같이' 영화관을 찾았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를 보기 위해서 였다. 우리 아빠는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옛날 사람인데 '플란다스의 개'라는 영화가 개봉하자 봉씨 가문에 영화감독이 나왔다며 우리 모두를 끌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 당시 관객수는 약 10만명이라고 하는데, 그 중 4명이 우리 가족이었다. 너무 오래 전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풋풋한 배두나의 얼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주연 이성재. 만화적인 연출, 우스꽝스런 스토리 등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어렸기 때문일까? 혹은 봉감독이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인지? 시간강사인 이성재분이 개를 훔치면서 시작되는 이 기묘한 코미디가 나에겐 좀 어려웠고 와닿지 않았다. 첫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나에게 봉준호 감독은 독특한 세계관과 연출력을 가진 감독으로 인식되었다.
+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자면,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봉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축하의 메세지를 전했고, 종친회 등을 언급하며 혈연을 강조했지만 당시 봉감독은 자신은 그런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아빠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라도 봉감독과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
'봉'이라는 성은 한국에서 얼마 없는 성씨이기도 하지만 그 음절이 지닌 강력함 때문에 모든 이름을 압도한다. 회사에서 'OO님' 으로 불리기 이전에 만난 인연들에서 나는 대부분 성을 포함한 이름으로 불리거나 친한친구들에겐 그냥 '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런 특이한 성 때문에 유치원에는 친구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다. 유아기의 많은 아동들은 똥얘기만 해도 꺄르르 웃는 더티유머를 좋아하는 특성이 있는데, 그 옛날 내 또래 친구들은 나에게는 와서 '뽕~' 방구소리를 내고 냄새가 난다는 시늉을 하며 놀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느 날은 너무 속상한 나머지 집에 돌아와 나는 왜 김**가 아니라 봉**냐며 김해김씨 엄마에게 따지듯 물으며, 김씨로 성을 바꾸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나의 선언에 엄마는 그저 허허 웃었다.
성씨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외국친구들을 만날 때 나는 내 이름으로만 불렸는데 (이름이 성보다 더 돋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성을 잘 알려줬다면, 봉감독의 수상소식을 들으며 '아, 나에게도 봉씨 성을 가진 한국 친구가 있었지' 라고 한번쯤 나를 떠올릴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대목이다.
나이가 들면서는 남들과는 다른 나의 특이한 성이 좋았다. 이름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의 유별한 명품 사랑 때문에 한 때 '3초백'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루이뷔똥은 '줘도 들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었고 명품을 산다고 하면 우리나라에선 많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아주 럭셔리한 브랜드를 구입해 홀로 뿌듯해 하리라고 생각했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남들의 평가나 시선에 의해 행동하기보다 개인의 주관에 따른 만족을 더 추구한다' 인데, 이 부분에 있어선 살인의 추억 전까지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꿋꿋하게 밀고 나간 봉준호 감독과 조금은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성격을 가진 나였기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남과 구분되는 나만의 정체성을 확실히 가질 수 있는 '봉'이라는 성씨를 나는 좋아한다.
이번 오스카 수상식, 그리고 칸국제영화제서부터 시작된 시상식 레이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봉준호 감독의 speech 솜씨였다. 물론 본인은 통역덕분에 생각할 시간을 벌어 가능한 일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했고, 물론 그 찰나의 시간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조금의 도움이 되긴 했겠지만, 그 주옥같은 한마디 한마디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임도 분명했다. 누구도 예상하기 힘들었던 기생충의 오스카 4관왕 수상의 쾌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봉감독의 뛰어난 언변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카데미는 로컬시상식이다' , '자막이라는 1인치의 장벽 뛰어넘기' 라는 어찌보면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인식하지 못했던 당연한 사실을 미국사회에 일깨워주었고 이번 오스카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을 '국제영화상'으로 그 타이틀을 바꾸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또 감독상 수상 후 함께 후보에 오른 거장들에게 바치는 위트있는 찬사는 어떠한가?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떠한 시상식에서도 자신이 아니라 경쟁자들을 그리도 센스있게, 그리고 진심을 담아 추켜세우는 멘트를 듣지 못했다. 이러한 봉감독의 인간적이면서도 무게감 있는 말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아카데미 시상식의 투표인단의 마음에도 와 닿았고 기생충을 향한 우호적인 투표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괴팍하게 보이기도 한 그만의 독특한 색을 가진 감독.
가까이서 보면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모두 집착하는 봉테일이지만, 난 사실 그가 숲을 보는 사람이며, 다만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린 숲을 완벽히 영상으로 재연하기 위해 나무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신도 꼼꼼한 연출로 주목받기 보다는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봉테일'이란 별명은 봉준호 감독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작은 집' 같다고 할까? 그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가족이나 배우 송강호씨 혹은 친한 친구들은 인간 봉준호를 'detail이 뛰어난 사람'에 더 포커스 해서평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봉테일' 보다 '마에스트로봉' 에 더 가깝다고 평가한다. 지휘자로서 곡의 해석하고 그것을 수많은 악기와 연주자로 하여금 어우러져서 결국 하나의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 말이다. 봉감독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세세한 부분들을 연출하기 위해 함께 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 멀게는 제작자부터 가깝게는 촬영감독, 배우, 그 외 많은 스텝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 설명을 해야했을까? 생각만으로도 아득하다.
회사에서 여러 부서의 사람들과 일을 하면서 생기는 미스 커뮤니케이션들이 생각보다 많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문화와 용어로 소통해도 서로 정확하게 동일한 것을 떠올리기가 어려운데 머릿속 생각을 배우와 촬영, 미술, 음향감독 이하의 스태프들을 통해 영상으로 세세하게 표현하고 하는 작업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것일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본래 사람은 본인이 가진 생각의 틀이 강해서 상대방이 A를 말해도 A'나 B로 이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감독이라는 자리의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1:1도 아닌 1:1000 정도의 규모에서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가며 자신이 계획한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작업, 게다가 세세한 부분에서까지 정확성을 높이는 일은 보통의 인내심과 끈기, 그리고 생각한대로의 완벽한 그림을 탄생시키고 말겠다는 집요함과 열정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 동안 나에게 봉씨로 산다는 것은 희성으로서의 소수이자 '봉'이라는 강력한 소리의 힘이 주는 어떠한 특별함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제 한 가지 의미가 더 늘었다. 봉준호 감독과 같은 성의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이제 대한민국에 '봉'이란 성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국제영화제에서의 쾌거는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을 만든 많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국뽕에 취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이번 한주만 '봉뽕'에 취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