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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로스엘 Mar 10. 2022

안 예뻐

초등 한국어학급 이야기

  이번 주부터 초등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작년부터 수업을 해 온 학교이다.


  내가 맡게 된 아이들은 한글 자모도 전혀 모르거나 거의 모르는 2학년 학생들이다. 학생 구성은 계속 변동이 생길 수 있다. 


  현재까지는 총 네 명인데 한 명이 아직 학교를 안 오고 있어 일단 세 명만 가르치고 있다. 두 명은 아랍권 학생들이고, 나머지 한 명은 러시아에서 온 학생이다.


  초등학교 2학년이니 정말 어찌나 작고 귀여운지 모르겠다. 항상 대학교 어학당에서 성인 학습자들만 10년 넘게 가르치다가 작년부터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정말 다른 세상이다. 성인 학습자와 어린이 학습자는 교사 입장에서 장단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가르치기에는 성인 학습자들이 훨씬 용이한 것이 사실이다.




  성인 학습자들은 성인이기 때문에 집중력이 좋고(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진도에 맞춰서 수업을 계획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특별한 돌발상황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다고나 할까.


  반면 어린 학습자들은 당연히 성인에 비해 집중력이 짧고 수업 내용에 대해서 흥미가 없거나 어렵거나 할 때는 그 의사표현을 분명하게 한다(안 하겠다고 떼를 쓰거나 딴짓을 한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계획했던 것을 다 하지 못할 때가 많고 아이의 상태나 분위기에 따라 준비했던 활동 대신 즉각적으로 다른 활동으로 대체해야 할 일도 생긴다. 당연히 진도는 계획한 대로 나가지 못할 때가 더 많고 돌발상황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학습 거부, 아이들끼리의 갈등 상황 등) 그때마다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성인 학습자에 비해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것도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다문화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구나 싶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어려움과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학교 어학당보다 초등학교에서 더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중이다. 아이들의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은 이 모든 어려움을 덮는 것 같다. 성인 학습자들에게서는 느끼기 어려운 아이들만의 솔직한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게 가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즐겁기도 하다.




  요르단에서 온 A는 그야말로 모범생이다. 여학생인데 수업 태도도 좋고 배우려는 의지도 강하다. 게다가 하얗고 통통한 얼굴에 쌍꺼풀이 진 큰 눈이 너무 예쁘다. 알게 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나를 보면 생긋 웃으며 품에 안긴다.   


  이집트에서 온 B 역시 여학생인데 A와 달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 놀고만 싶어 한다. 그래서 절대 일반적인 학습 방법만으로는 가르치기가 힘들다. 놀이에 접목을 해서 놀이처럼 가르쳐 주면 매우 즐거워한다. B 또한 공부는 싫어하지만 애교가 많고 귀여운 학생이다.


  러시아에서 온 남학생 C는 부모님이 고려인이셔서 외모는 영락없이 한국인이다. 이 학교에 이번 학기에 처음 온 학생으로, 처음에는 말이 없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표정도 무척 밝아지고 무엇보다 장난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B에 비해 집중력도 좋고 하라는 대로 잘 따라온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칠판에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교실에 마련된 학습 교구들을 이용해서 놀기도 한다.


  학습 교구 중에 나라 이름과 국기가 그려진 나무 블록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놀던 B가 나에게 블록 몇 개를 가져와서 거기에 적힌 나라 이름들을 읽어 달라고 한다. 브라질, 프랑스, 포르투갈 등등. 그러다 또 하나의 블록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국기와 이름이 적힌 블록이었다.


  "이.스.라.엘. 이건 이스라엘이야."


  천천히 '이스라엘'이라고 읽어주었더니 B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한다.


  "안 예뻐."




  이 아이들에게 '안 예쁘다'라는 것은 '싫다'를 의미한다.


  작년에 1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 국적을 막론하고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의 경쟁 관계가 심했다. 그러다 보니 경쟁을 넘어 서로 견제하고 어울려 놀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 아이들은 서로를 향해서 목청껏 외쳐대곤 했었다.


  "OO 안 예뻐!"

  "나도 OO 안 예뻐!!"


  '밉다'나 '싫다'라는 고급 단어(!?)를 몰라서인지 부정 표현인 '안'에다가 '예쁘다'를 결합시켜 서로를 싫어한다는 의지를 표현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이 안 예쁘다고 하는 B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랍 아이들은 이스라엘을 싫어한다. 그들의 역사를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렇게 작고 어리고 사랑스러운 아이들까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왠지 안타깝고 씁쓸했다.




  작년에 고학년 아이들은 나에게 대놓고 이런 질문들을 했었다.


  "선생님, 이스라엘 좋아요, 팔레스타인 좋아요?"


  성인 학습자들이라면 결코 하지 못할 질문들을 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한다. 반에 아랍 아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교사는 매우 난처해진다. 어느 나라만 좋다고 하기도 어렵거니와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럴 땐 질문을 못 알아들은 척 어물쩡 넘기기도 하고, 다른 화제로 얼른 이야기를 돌리기도 했다. 그래도 끈질기게 물어보면 "선생님은 다~~ 좋아." 이런 식으로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하곤 했다. 지금 함께 수업을 하고 계신 선생님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럴 때는 그냥 "선생님은 한국이 좋아."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어제는 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나라가 온통 갈라지는 느낌이 들어 걱정도 되고 서글퍼진다. 지역으로 갈리고, 성별로 나뉘고, 세대별로 대립하는 모습들이 안타깝다.


  서로에 대해 '안 예뻐.' 정도가 아니라 입에 담을 수 없는 험담과 욕을 하는 사람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지나친 비방이나 욕설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그런 말들을 듣고 자라 마음 속에 증오심이나 혐오를 키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성숙한 인격을 지닌 시민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사회 분위기밝아지고 발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선생님, 예뻐."


  오늘 A가 나에게 두 번이나 이 말을 해 주었다. 아마 이것 역시 내가 외모적으로 예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좋아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서로 싸우지만 말고(물론 도움이 되는 적절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가급적 서로를 기분 좋게 하는 말, 행복해지게 하는 말을 많이 하며 들으며 살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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