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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로스엘 Apr 21. 2022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초등 다문화 아이들의 봄 나들이

  어제는 내가 한국어 수업을 하고 있는 다문화 초등학교에서 봄 소풍을 다녀왔다.


  사실 봄 소풍이라고 하기보다는 따뜻한 봄 날씨에 아이들과 산책을 다녀왔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5분도 안 걸리는 작은 공원에 걸어가서 그림을 그리고 조금 놀다 온 것이 다이기 때문이다. '소풍'이라고 하면 흔히 연상되는 도시락도 없었다. 오전 시간에만 잠깐 다녀와서 학교에서 급식을 먹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아이들에겐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모자를 쓰고 가방을 메고 담임 선생님 뒤를 쫄랑거리며 따라 걸어가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듯 사뿐하고 발랄했다. 모처럼 교실을 벗어나 공원에 놀러 가니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 간단한 나들이지만 이렇게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이 코로나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한국어 수업은 오전에 있는데 오전에 소풍을 가게 되어 한국어 수업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1학년 아이들의 보조 교사로 함께 다니고, 다른 한국어 선생님 한 분은 인원이 많은 3학년의 보조 교사를 하기로 하셨다. 나 또한 수업 대신 날씨 좋은 날 산책을 나가니 왠지 들뜬 기분이 되었다.


   작년부터 수업을 했지만 이 학교 근처에 이런 작고 예쁜 공원이 있는 줄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학교도 아니었고, 항상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학교 주변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학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가자 작은 오솔길이 펼쳐졌고 아이들이 모여서 그림도 그리고 놀 만한 공간도 나타났다. 나무로 만든 데크 위에서 1학년 아이들은 나무도 그리고 꽃도 그렸다.


  그림을 그리다가 가끔 개미나 벌, 거미 등이 출몰하면 한바탕 비명을 지르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실은 나도 벌레를 보면 한 비명 지르는데 아이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느라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아주 의연하고 차분하게 아이들을 안심시키곤 했다. 


  "얘들아, 괜찮아. 가만히 있으면 돼." 


옹기종기 모여 그림을 그리는 1학년 다문화 아이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초등학교 아이들, 특히 저학년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선생님을 부르고 찾는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느라 그러는 것이다. 입이 닳도록 선생님을 부르는 건 한국 아이들이나 다문화 아이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파키스탄에서 온 A는 고맙게도 꽃, 나무와 함께 내 얼굴까지 그려 주었다. 그런데 정말 몸통은 없이 얼굴만 그렸다. 몸통이 없으면 어떤가! 얼굴만이라도 예쁘게(?) 그려준 것이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그림 맨 왼쪽 몸통 없는 여자가 바로 나라고 한다.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갑자기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어쩌면 저렇게 거침없이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면 뭘 그릴까 생각하고, 좋은 구도는 무엇일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잘 그릴까 궁리하느라고 한참 시간을 보냈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정말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쓱쓱 그린다.


  나도 어렸을 때는 저랬겠지? 어렸을 때가 하도 오래전이라 내가 어떻게 그림을 그렸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아이들의 저 '거침없음'이 너무도 부럽고 좋아 보인다.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난 아이들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일어나 신이 났다. 이제 즐겁게 뛰어노는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림 그리기를 마치면 아이들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기로 했다고 하셨다.


  작년에 '오징어 게임'이 히트한 후로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 작품에 나왔던 놀이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중에서 우리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인데 아직까지도 그 인기가 식지 않았다.


  이건 여담이지만 나는 '오징어 게임'을 보지 않았다. 잔인하게 사람이 죽는 영화나 드라마는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해도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초등학교 꼬맹이들이 '오징어 게임'을 알고 있다. 나는 작년부터 이것이 참 신기했다. 설마 본 것일까? 어찌 됐든 드라마에서 잔인함을 걷어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들이 남으니 그거 하나만큼은 좋은 것 같다.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짜랑짜랑하게 울려 퍼진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변종인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모습

 

 "얘들아, 고구마꽃이 아니라 무궁화 꽃이야...!"


  아무리 수정을 해 주어도 그때뿐이다. 작년부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봐 왔는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제대로 외치는 걸 들은 적이 없다. 늘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우렁차게 외치며 논다. 다문화 아이들에겐 '무궁화'라는 말이 발음하기 너무 어려운지 어느새 무궁화가 '고구마'로 바뀐다.


  제대로 알려 주고 싶은 마음에 '무궁화'라고 고쳐 주긴 하지만 사실 무궁화면 어떻고 고구마면 어떠리. 즐겁게 외치며 뛰어 논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러고 보니 난 고구마꽃이 실제로 있는지조차 몰랐다. 궁금해서 찾아 보니 이름과는 달리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랐다. 왠지 고구마꽃이라고 하면 투박하게 생겼을 것 같은데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게다가 진짜 무궁화꽃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서 더욱 놀랐다.


고구마꽃. 나팔꽃과 매우 비슷한데 무궁화와도 꽤 닮았다.

 

 따뜻한 봄날, 아주 약간은 서늘함을 품은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고, 아이들의 꾸밈없는 웃음이 있으니 마냥 행복하고 즐거웠다.


  아이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자라온 배경도 다르지만 서로 즐겁게 소통하며 깔깔 웃고 떠든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국적을 막론하고 아이들에겐 어른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분명히 어른들도 어렸을 때는 가졌던 능력이고 모습일 텐데, 왜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모습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왜 어른들은 끊임없이 재고 판단하고 주저하며 무엇인가에 꽉 막혀 있는 것일까.




  "선생님~!"


  나와 눈이 마주치면 달려와 폭 안기는 귀염둥이 아이들.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나도 아이들이 가진 거침없는 에너지와 누구와도 꾸밈없이 소통하며 친구가 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짧았지만 봄 속에서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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