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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다시 만나다

잊고 살았던 그 아련한 기억을 다시 소환하다

by 곤리 Gonli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을 난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로부터 나의 첫인상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해맑은 미소와 변덕스러운 봄날씨 같은 나의 표정에서 가슴 벅찬 감동과 떨림을 느꼈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녀의 가슴속에 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새겨져, 시간 속에서도 선명하게 남았던 것 같다. 내가 대학을 가고, 군에서 시간을 보내고, 결혼해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말없이 지켜봐 주었고, 내가 필요할 때면 늘 변함없는 따뜻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우리의 운명적인 만남은 마음속 깊은 곳에 나만의 해자를 두른 철옹성으로 무한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그녀가 남편을 사별한 지는 10년은 넘었지만 그렇다고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인생의 모든 것을 혼자서라도 떠 앉고 갈 기세다. 난 오늘 전화기를 들었고 저 너머에 기쁨의 환희가 둥실둥실 피어오르는 그녀를 직감하였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아내가 옆에 있는지 확인하곤 했는데, 난 그때마다 그녀를 안심시켜야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곁에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소소한 일상과 짜증 나는 순간들을 풀어놓는다. 난 그녀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사실 잘 기억을 못 한다.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새로 사귄 친구는 누구인지, 좋아하는 가수는, 취미는...... 그런데 나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내가 무심코 했던 얘기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다시 마주한 건 지난 설 명절이었다. 그녀는 '한국의 나폴리'라는 남해안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TV에서는 무안에서 '제주항공기 사고'로 가족여행, 신혼여행 갔던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남겨진 가족, 연인들의 슬픔을 종일 방송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더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아려오는지도 모르겠다.


설 연휴가 시작할 때쯤 고향에 사는 조카가 '시민문화회관'에서 댄스공연을 하는데 그곳에 그녀도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린 일찍 고향을 들렀다 오기로 했기 때문에 그 날짜에 맞출 수가 있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 일찍 들뜬 마음에 서두르기 시작했고 설렘으로 운전대를 잡고서 출발하였다. 최근 들어 눈도 많이 내린 터라 "조심조심 천천히 내려와"라는 그녀의 당부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저녁 6시 공연시간을 맞추기 위해 온 신경을 다 쏟았다. '왜 그렇게 서두르냐'라고 아내의 근심 어린 눈빛이 스치고 지나가지만 난 애써 무시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길이 더 미끄러울 수 있으니 서둘러야겠어"라고 짧게 한마디 한다.


두 아들과 아내를 태우고 떠나는 여행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는 바닷가의 멋진 카페를 찾아서 사진 속에 담아내고, 동생 내외와 미리 잡은 골프약속으로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섬 사이로 바닷바람을 가르며 첫 샷을 날릴 생각에 어쩌면 더 들뜬 상태인지도 모를 일이다. 두 아들은 공부로부터 해방되는 절호의 기회이자 휴게소에서 맛보는 달콤함을 기대하지만 그러나 모든 게 만족스럽지 않다. 특히 둘째 녀석은 좋아하는 게임을 핸드폰으로 할 수 없다고 온갖 짜증은 다 들고 간다. 드디어 10시간의 긴 여행이 끝나고 공연 시간 30분이 지났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내는 다시 찾은 도시의 온갖 불빛들을 정신없이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댄다. 아이들은 장거리 여행에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한 상태이다.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고 조명은 꺼진 상태라 내부는 깜깜했다. 공연중간 휴식타임에 동생내외가 우리 곁에 와서 인사했다. 난 공연장 둘째 줄, 가장자리에 꼿꼿이 앉아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조명에 비친 옆모습은 약간은 상기되어 있었고 보랏빛 외투에 누구에게 줄 울긋불긋한 꽃다발을 안고서 앉아있었다. 난 주위사람들은 의식하지 않은 채 그녀에게로 뛰다시피 걸어갔고 근처에 다다렀을 때 나는 큰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엄마!"


그녀는 환한 미소로 쳐다보면서 옆에 와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칠순잔치 이후 5년 동안 두 번의 큰 수술로 힘든 나날을 견디어 왔다. 얼굴 여기저기 자리 잡은 주름은 강렬한 조명과 진한 화장으로도 덮혀지지가 않았고 꼭 맞잡은 두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 그 속엔 지나온 세월의 거친 바람과 견뎌낸 고난의 무게가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하지만 난 왜인지, 그녀의 삶에서 가장 눈부셨던 순간을 오직 한 장의 사진으로만 간직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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