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 야옹, 야옹 "
아이와 집에 오는 길목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하고 주변을 살펴보니 근처 빌라 경비원 아저씨께서 다리 다친 아기 고양이라며 손가락으로 위치를 알려주셨다. 담벼락 사이에 아기 고양이가 엎드린 채 울고 있었다. 바로 위쪽에 어미 고양이와 또 다른 아기 고양이들이 보였는데 어미 고양이는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새끼들을 챙기고 있었다. 아저씨 말로는 어디 누구한테 맞아서 다리를 다친 모양이란다.
"엄마, 우리가 데려가서 치료해주자! "
"어떻게 데려가, 저기까지 사람이 들어가기도 힘들고 어미가 위에 앉아있잖아. 금방 돌봐 줄 거야."
아이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미가 다친 아기 고양이를 돌보지 않을 거라는 걸. 길냥이의 삶에서는 강한 새끼만을 보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게 약육강식의 법칙이고 그들의 삶이다.
"안 돌봐주면 어떡해, 우리가 구해주자! "
" 고양이 데리고 와서 병원 가면 돈도 많이 들고 아기 고양이를 집 에서 어떻게 키워"
" 내 통장에 있는 돈 꺼내서 쓰면 되지, 나 은행에 돈 있어"
아이들은 순간순간에 집중한다. 돈의 의미가 아직은 크지 않은 나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본인에게 중요한 것일 텐데, 스스럼없이 자신의 돈을 다 써서 고양이를 구하자는 말을 하다니. 순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이에게 당연한 것이 나에게도 당연했지만 난 할 수 없었다. 고양이를 데려와 병원에 데려가는 것, 그리고 집에 데려가 돌봐주는 것.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돈이란 족쇄는 내 발목을 잡았고, 집에 계신 11살 묘르신의 반응도 걱정이었다.
유튜브, sns에 아프고 병든 동물을 자신의 일처럼 거두어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라고 형편이 넉넉하거나 상황이 완벽한 상태에서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에게는 왜 그 일들이 너무나 어려운 걸까. 유기견, 유기묘를 돕는 단체를 팔로우하고 그들의 일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가끔 작은 돈이나마 기부도 하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하는 기분이다. 부모가 되고 어른이 되면 당연히 해야지 했던 일들이 아직도 어렵기만 하다. 가끔은 아이처럼 그냥 저지르고 싶다가도,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쳐 쉽게 포기해버린다.
다음날 찾아가 본 그 자리에 아기 고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미 고양이가 데리고 갔는지, 착한 어떤 이의 보살핌을 받게 됐는지 마음이 살짝 가벼워졌다, 곧 다시 무거워졌다.
다음에 또 만난다면 나는 그 아기 고양이를 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