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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Jan 08. 2021

고장 난 믹서기를 고치며

믹서기가 고장 났다. 아이에게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주는 용도로 자주 쓰는데 몸통에 있는 홈에 자꾸 물이 들어갔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당연히 물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 부분이 분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홈에 들어간 물이 잘 빠지지 않으니 그 안에 물때가 끼었다. 힘으로 빼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최신 모델은 분리가 되는 모양인데 과거 버전인 내 믹서기는 일체형이라 분리가 안 되었다. 물때가 보이니 영 찝찝하지만 최대한 기구가 들어가는 곳까지만 닦아서 썼다.


주말 아침 아이가 바나나와 우유를 들고 와서 남편에게 갈아달라고 했다. 남편은 설거지통에 있던 믹서기를 닦는 것부터 시작했다. 믹서기 칼날 부분의 고무 패킹을 빼서 닦았는데 이걸 다시 끼우려니 쉽지 않았다. 핀셋도 써보고 포크로 누르면서 해봐도 고무 패킹은 들어가는 척하다가 다시 튕겨 나왔다. 아무래도 칼날을 빼서 고무 패킹을 끼운 뒤 다시 조립해야 될 것 같았다. 남편이 연장통을 가져와 판을 벌였다. 시작은 고무패킹이었지만, 결국 믹서기 본체의 홈까지 분리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나도 패킹을 끼우고 칼날을 분리해보려 드라이버를 만지작거렸지만 잘 안되길래 몇 번 하다가 진즉에 그만두었다.


아이는 자기의 바나나 우유가 언제 되는가 싶어 계속 남편 근처를 기웃거렸다. 연장이 위험하니 근처에 가지 못하게 했더니 바나나와 우유를 아빠 근처에 놓고 간다. 얼른 해달라는 거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이참에 새로 사자는 나와 그래도 끝까지 해봐야 한다는 남편 사이에서 주말 오전이 흘러갔다. 남편 눈에서는 '살려야 한다'는 레이저가 나오고 있었다. 남편은 이날 못 고친 믹서기를 다음날 아침에 결국은 고쳐 놓고 출근했다.


나는 포기가 빠른 편이다. 설령 그것이 조금 부당해 보이는 일이라도 누군가가 '안 된다'라고 하면 바로 '네' 하고 돌아선다. 나와 대화하는 사람이 그 결정을 뒤집을 만한 권한이 없는 위치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언성을 높인들 화풀이밖에 더 되겠는가. 정식으로 항의하려면 결정권자에게 의견을 내면 되겠지만 그건 또 귀찮아서 관둔다. 대개는 그냥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어떤 내부 사정이 있겠지, 생각한다.


매번 이렇게 도망치듯 빠져나오다 보니 마음 한편에는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늘 빚을 진 기분이다. 그래서 자신의 불편을 무릅쓰고 옳은 방향으로 물길을 돌리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존경의 눈으로 보게 된다. 세상은 저렇게 바꾸려는 사람 덕분에 변하고, 가만히 앉아서 ‘네네’만 하고 있던 나는 행동하는 사람들이 바꿔 놓은 세상에서 혜택을 본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에 빚지고 기대어 사는 사람인지라 평소에 이런 사람을 만나면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따지는 사람이 내 옆사람이면 골치 아파진다. 남편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잘못된 관례가 있다면 그걸 고치길 요구한다. 안 되더라도 이유는 정확히 알고 싶어 한다. 어떤 이유로, 어디에서 막혀서 안 되는지, 해결 방법이 정녕 없는지 찾으려 노력한다. 안 된다는 사람 앞에서 굳이 더 캐묻지 않고 돌아서는 나와는 태생이 다르다. 그럴 때면 나는 돌아서려다 말고 남편 옆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모양이 되곤 한다.


남편의 성격이 매번 장점일 수 없듯이 내 성격 또한 매번 단점이 되진 않는다. 남편은 묻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꽤나 스트레스를 받고 많은 시간을 쓴다. 나는 에너지를 아끼고 내적 상처를 미리 피하는 반면 문제 해결을 위해 원점에서부터 다른 방법을 찾거나 일정 부분 피해를 감수하고 포기한다.


토지 등기를 마친 뒤 관계자 변경과 산지전용허가를 연장하는 데 한 달 넘게 걸린 것 같다. 자잘한 걸림돌들이 나타났다. 그때마다 남편은 여러 곳에 전화를 하고 협의를 위해 군청으로 내달렸다. 수수료를 내고 맡기자는 나와 달리 과정마다 직접 해결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몇 주 뒤 민원이 처리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일찌감치 포기한 나는 머쓱해졌다.


집 짓는 동안 우리의 성격이 좀 더 단단해져 있을지, 조금씩 변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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