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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Jan 18. 2021

경계를 찾아서

한 달 반을 기다린 끝에 측량일이 되었다. 지역마다 대기 기간이 다른데 양평은 측량 일정이 많아서 이제야 차례가 된 것이다. 우리 땅을 기준으로 양 옆집 모두 지은 지 오래되지는 않았다. 오른쪽 집은 대략 5년, 왼쪽 집은 3년이 되었다. 두 집 모두 집을 짓기 전 측량을 했을 테니 우리 땅을 침범하거나 우리 땅이 옆집으로 넘어가는 등의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도 측량일에 내 땅 주변으로 맞물린 이해관계인이 참여하는 게 좋으므로 남편이 미리 양 옆집에 롤케이크와 함께 측량 소식을 전했다. 한 집은 부재중이어서 선물과 쪽지를 남기고 돌아왔다.


다음 날 11시에 맞추어 문호리로 향했다. 30분 정도 먼저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란 잠바를 맞춰 입은 세 분이 우리 땅 주변을 분주히 오갔다. 지적공사에서 나온 측량팀이 경계점을 잡는 중이었다. 측량팀에 우리가 왔음을 알리고 인사를 한 뒤 양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다행히 모두 집에 계셨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측량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측량은 한 시간가량 걸렸다. 평지에 있는 땅이라면 30분 내외로 끝나겠지만 옹벽 아래쪽도 측량하기 위해 경계점을 새로이 잡아야 해서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지도상으로는 옹벽이 경계를 넘어간 것처럼 보여서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경계 내에 여유 있게 들어와 있었다.  


각종 장비를 들고 측량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아침이면 마당으로 나가 수도와 전기 계량기의 숫자를 기록하며 사용량을 매일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폭설이 와도 장맛비가 들이닥쳐도 건너뛰지 않았다. 그렇게 적은 사용량을 한 달 뒤에 나오는 고지서와 비교했다.


아빠의 매일 반복되는 루틴에는 가계부도 빼놓을 수 없었다. 결혼 후부터 쓰기 시작했다는 가계부가 벌써 몇 권째인지 모른다. 스프링 노트를 펼쳐 왼쪽 페이지에는 아빠가 쓰고, 오른쪽은 엄마에게 쓰도록 했다. 십 원 단위까지 모두 적고(아빠 나이 일흔이 넘은 지금은 백 원 단위까지만 쓰는 걸로 너그러워졌다), 전기, 수도 등의 공과금은 알아보기 쉽도록 노란색 형광펜을 덧입혔다. 동네 아줌마들과 고스톱을 치다가 져서 아빠 모르게 돈을 메꿔야 할 때면 엄마는 딸들의 이름을 적으며 '땡땡이 용돈' 이런 식으로 입출금을 맞춰 놓았다. 매달 결산을 하며 잔액이 맞지 않으면 아빠의 타박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본가가 문화재 복원 사업으로 수용될 때 책정된 보상금이 있었다. 집 크기도 상관이 있었던 모양인데 아빠는 전문 장비 하나 없이 오래된 줄자를 들고 우리 집을 재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번을 재도 군에서 고지한 면적이 아빠가 잰 것보다 작았다. 이는 곧 보상액과 연결되는 일이었다. 며칠 동안 아빠는 눈만 뜨면 줄자로 집을 재기 시작했다. 이렇게도 재보고, 저렇게도 재보고. 그래도 집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군에서는 아빠의 의견을 듣고 측량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새로 측량한 결과에 이의 없이 따르기로 하고 일이 진행되었다. 결과는 아빠가 오래된 줄자 하나에 의지해 잰 것이 맞았다. 아빠의 오랜 꼼꼼함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물론 측량하는 동안 아빠는 측량팀 옆을 그림자처럼 지켰다.


우리 땅을 측량하는 날은 최강 한파여서 아빠처럼 꼼꼼히 측량팀을 따라다니지는 못했다. 나름 챙긴다고 두툼하게 입었지만 밖에 오래 있다 보니 장갑 낀 손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남편이 측량을 지켜보는 사이 옆집에서 마당에 불을 피워 자리를 내주고, 또 다른 옆집에서는 레몬차를 주셨다. 따뜻한 레몬차를 마시니 몸이 녹았다. 그 사이 남편은 측량팀이 갖춰 입은 두툼한 고어텍스 점퍼를 탐내며 옹벽 위아래를 오르내렸다.


측량이 모두 끝나고 경계 지점에는 빨간 말뚝이 세워졌다. 우리가 가장 우려했던 옹벽이 경계를 넘어가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고생한 측량팀에 인사를 하고, 서류에 사인을 한 뒤 차에 올라탔다. 밖에 오래 있었던 탓에 손이 녹지 않아 히터를 켜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제 좀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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