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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Jan 27. 2021

혼자 노닥거릴 공간, 작업실

남편은 큰 책상을 선호한다. A3 크기인 설계 도면을 여러 장 보고, 트레이싱지에 스케치를 하고, 우드락으로 모형도 만들려면 작은 책상으로는 빠듯하다. 그래서 책상 두 개를 기역자로 붙여 쓰곤 했다. 하지만 작년에 이사를 오면서 공간이 부족해 책상을 하나만 가지고 왔더니 역시나 자리가 모자라 보조 테이블을 옆에 두고 근근이 지내고 있다.


나는 책상에서 주로 웹서핑, 글쓰기, 책 읽기를 하므로 책상의 크기가 일 순위는 아니다. 또한 책상 위에는 항상 여러 권의 책과 이면지, 볼펜이 굴러다녀서 책상 상판을 보기가 어려우므로 비싸고 좋은 책상에도 욕심이 없다(깔끔하게 정돈된 남편 책상과 달리 내 책상은 어느 정도의 혼돈을 내포하고 있다). 내 기준에서 책상은 싸고 튼튼하면 좋은 것인데 지금 쓰는 책상은 이 조건은 충분히 충족한다. 10년이 돼가는 데도 너무 멀쩡해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다.


책상을 볼 때 싸고 튼튼한 것 이전에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밀폐성이다. 책상은 집 전체에서 온전히 나 혼자 쓰는 내 공간이다. 거실, 부엌, 안방 등은 다른 가족과 함께 써도 책상은 공유하지 않는다. 아이가 가끔 내 책상에서 컴퓨터를 만지거나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기는 하지만 네 살 아이에게는 약간의 예외를 둔다.   


남편 자리에서 내 모니터가 안 보이게끔 책상을 배치한다. 남편은 본인 모니터가 보이든 말든 신경쓰지 않으므로 오픈된 자리를 주고 난 구석으로 들어간다. 보통의 회사로 보면 나는 사장 자리이고 남편은 사원 자리이다. 고개를 조금만 들면 남편이 뭘 하는지 볼 수 있다. 반면 남편은 내 자리를 보려면 일어나서 몇 걸음 떼어야 한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남편이 일어남과 동시에 나는 '알트+탭' 키를 눌러 화면을 전환한다. 멋진 남자 연예인 사진을 꼼꼼히 감상하거나 도박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가린다.


남편은 자기가 하는 일을 공유하는 걸 좋아해서 내가 뭘 하는지도 알고 싶어 한다. 호시탐탐 내 자리를 궁금해하는 남편은 불시에 내가 뭘 하는지 점검하려 들지만 나도 만만치 않다. 창과 방패의 팽팽한 접전이다.


그래도 책상을 완전히 안 보이게 할 수는 없다. 한계를 깨닫고 온전한 내 공간이 갖고 싶어서 신혼집에서는 독서실 책상을 사기도 했다. 밀폐된 방처럼 된 걸 사고 싶었으나 가격과 크기가 만만찮아서 차선책으로 다른 걸 샀다. 독서실 책상을 잘 쓰다가 두 번째 집으로 이사하면서는 둘 곳도 마땅치 않고 집과 어울리지 않아서 중고나라에 팔았다.

왼쪽을 사고 싶었지만 가격과 크기를 고려해 오른쪽 책상으로 구입했다(사진 출처: 이스마트).


밀폐된 책상을 찾는 것은 온전한 내 공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대학교 때 살았던 학교 기숙사는 4인 1실이었다. 혼자 방을 쓰다가 작은 방 한 칸에 스무 살이 넘은 사람 네 명이 모여 살아야 했다. 생활 습관과 활동 시간대가 달라서 불편하긴 했지만 이층 침대에 올라가 커튼을 치면 내 공간이 생겼다.


처음엔 멋모르고 얇은 홑겹 커튼을 달았더니 빛이 다 들어왔다. 중간에 기숙사를 퇴소하던 같은 방 언니가 물려준 두툼한 암막 커튼을 치니 비로소 밖과 완벽히 차단되었다. 어두컴컴해진 침대 머리맡에 스탠드를 켜 놓고 엎드려서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하며 뒹굴거렸다. 네 명이 복작거리며 살아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숨쉴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암막 커튼을 친 침대가 지금은 책상으로 그 대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을 집에서는 작업실로 나타날 것이다. 거창하게 뭘 하지 않아도 혼자 노닥거릴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데 그게 작업실이다. 책상 하나로 남편과 아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니 온전히 분리된 공간을 원한다. 문호리 집에서는 나의 작업실과 남편의 작업실을 분리하기로 했다. 작업실은 별채가 될 수도 있고 2층 방이 될 수도 있다. 내 작업실에는 도어록을 달까 싶다. 남편은 농담인 줄 알고 웃지만, 진심이다. 비밀번호는 아무에게도 안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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