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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Jul 07. 2021

여행하는 기분

문호리에 갈 때마다 여행하는 기분이다. 양평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흐르고 전체 면적 877.65제곱킬로미터 중 산림이 73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초록이 있다. 양평 군청 홈페이지에는 '세상 아름다운 여행지, 양평에 머물다!'라고 쓰여 있다. 여행지로 소개하는 곳을 우리는 살러 가려고 집을 짓고 있지만.


남편과 연애할 때 태국 여행을 갔었다. 연애 10년 차였던 것 같다. 10년을 만났지만 해외여행은커녕 국내여행도 몇 번 안 가본 우리였다. 나는 대학생을 지나 취업 준비생이 되었지만 시험을 준비하면서 마음의 여유도 없고 금전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 스물 여덟의 늦은 나이에 비로소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취업한 해에 입사 2년 차였던 남편은 자기가 여행 비용을 댈 테니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에게는 연이은 밤샘과 살인적인 일정의 현상설계를 마친 대가로 며칠의 휴가가 주어진 터였다. 다행히 내가 다니던 회사도 당시에는 휴가가 후했다. 우리는 호기롭게 일주일의 휴가를 쓰고 태국으로 갔다.


평생을 같이 산 부부도 여행 가면 싸우는 경우가 허다한데 우리는 의외로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택시비를 바가지 쓴 것 같다고 내가 씩씩댈 때도 그래 봤자 한국 돈으로 이 천 원이라며 신경 쓰지 말자고 하고, 무거운 짐도 남편이 도맡아서 들었다. 태국에 간 지 이틀 만에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서 김치찌개집을 찾아 헤맬 때도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김치찌개를 먹고 싶어 하는 주체가 나였다).


아니 얘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나, 오래 사귀어서 내가 너를 너무 무디게 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우리는 결혼을 했다. 작년의 태국 여행이 결혼 결심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쳤다. 여행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몇 년이 흘러 생각해 보니 남편은 그냥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오니 자기 기분이 좋아서 옆 사람에게 후하게 대한 것뿐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나'여서가 아니라 그게 누구든 잘해줬을 것이다. 남편이 써 놓은 여행 일기가 이를 뒷받침하는데, 둘이 같이 와서 좋다는 건 처음 한 줄 뿐이고 나머지는 죄다 그저 여행 찬양문이다.  


방갈로 숙소 앞에 둔 자기 신발에 두꺼비가 들어가 있어도 껄껄 웃던 사람, 맛없는 요리도 즐겁게 먹던 사람은 지금도 여행할 때면 나온다(실생활에서는 글쎄...). 야근과 밤샘을 수시로 하던 그때의 남편에게는 여행이 극한 상황이 아니라 현실이 극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설계가 끝난 뒤 시공사 선정을 마치고 공사에 들어간다. 마음 편히 해외여행을 가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요즘이다. 비록 해외여행은 못 가지만 양평 생활이 남편에게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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