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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Sep 26. 2021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이야기

주차장 입구가 좁아서 한전에 전신주 이전 설치를 했다. 애매하게 놓인 전신주가 조금만 옆으로 가도 차를 대고 빼는 일은 훨씬 수월할 것이다. 특히 나 같은 초보 운전자에게는 더더욱.


운전을 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초보 스티커는 굳건하게 붙어 있다.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쇼핑몰과 마트에는 매일 다닌다. 너무 다니는 곳만 가서 운전이 늘지 않는가 걱정하던 차에 25분 거리의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했다. 집 앞에도 필라테스 학원이 두 군데 있지만 이곳 수강료가 훨씬 저렴해서다. 어차피 매일 마트에 가니 거기서 10분만 더 가자, 해서 내 나름 멀리 있는 곳으로 등록했다. 운전 연습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이런 게 일석이조지 하면서.


다만 간과한 게 있었으니 주차였다. 건물이 큰 만큼 많은 상가와 사무실이 입점해 있는데 상담을 간 날은 오후 시간대라 주차장이 여유로웠다. 하지만 오전 시간에는 지하 4층까지 있는 주차장이 꽉 차기 일쑤였다. 주차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통로에도 차들이 늘어서고, 빈자리를 찾아 주차장을 뱅뱅 도는 차들도 있었다.


첫날부터 정신이 혼미했다. 수업 시간은 다가오는데 자리는 없고 어쩌다 발견한 빈 곳은 옆에 차가 선을 밟고 훌쩍 넘어온 경우였다. 그나마 경차 자리가 있어서 가까스로 주차를 하고 올라가 다행이었다.


수업을 듣고 내려와서는 다시 근심에 휩싸였다. 할인 행사할 때 등록한 거라 환불도 안 되는데 이러고 세 달을 다녀야 한다니. 정신을 부여 잡고 출구로 나가는데 커브길에서 마주 오던 벤츠와 부딪칠 뻔했다. 벤츠도 나도 중앙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서로 너무 가운데에 붙어 있던 탓이다. 수강료 몇 만 원 아끼려다 몇 배의 돈을 더 쓸 뻔했다. 서행을 하고 있던 터라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수 있었다. 그 뒤로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얼마 뒤 아빠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싼 곳 찾아갔다가 하마터면 벤츠와 부딪혀 돈이 더 깨질 뻔했다며. 내 얘기를 듣더니 아빠는 힘주어 말했다.  


"보험 다 들고 했으니 부딪쳐도 상관없다. 그거 다 보험으로 되니까 걱정 말고 운전하고 다녀라. 사람만 안 다치면 되는 거야."


고맙고 힘이 되는 말이지만 옛날 생각이 났다.



내가 고등학생 때 엄마는 빨간 티코를 탔다. 그걸로 외할머니 집에도 가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오기도 했다. 장난으로 밀어도 흔들릴 만큼 작고 가벼운 차였다. 비가 많이 와서 바퀴가 거의 잠긴 어느 날은 사거리에서 물살을 못 이기고 둥둥 옆으로 떠가기도 했다.


우리 집은 길게 이어진 좁은 길을 들어와야 마당이 나오는데 엄마는 그 작은 차로도 마당에 들어오는 걸 힘들어했다. 그래서 집 앞에 도착하면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주변 이웃에게 주차를 부탁하곤 했다. 차가 긁히는 걸 두려워 말고 꾸준히 연습하면 됐겠지만 아빠가 차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면 엄마를 타박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마당에 세워둔 빨간 티코 주변을 살피며 엄마가 새로 만든 흠집들을 찾아냈다.  


그랬던 아빠가 딸인 나에게는 관대하다. '아빠'의 자리에서 하는 말과 '남편'으로서 하는 말은 다른가 보다. 내가 똑같은 이야기(벤츠와 코너에서 부딪칠 뻔했다)를 남편에게 했을 때 남편은 아빠와는 제법 다르게 말했다.


"부딪치면 안 되지!"


결과적으로 부딪친 것도 아니고, 설사 부딪쳤다 한들 내가 일부러 그랬을까. 분하지만 운전 실력을 키우는 방법 밖에 없겠지. 더불어 응분의 다짐을 한다. 앞으로 나도 남편 차를 수시로! 불시에! 점검하겠다. 잊지 마라, 나에겐 우리 아빠의 피가 흐른다.


이상,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이야기.


 




3개월 24회 특가로 끊은 필라테스는 결국 절반도 가지 못하고 날렸다. 내가 간 횟수를 비용으로 나눠 보니 집 앞 필라테스 학원보다 비싸게 다닌 꼴이 되었다. 운동은 가까운 곳이 최고인데 어리석었다. 상처만 남은 필라테스를 접고, 지금은 '뮤직 복싱'에 다닌다. 빨리감기한 음악에 몸을 싣고 신나게 '귓방맹이'를 날리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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