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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Mar 03. 2022

남편 방 탐험기

간혹 낮 시간임에도 남편 방에 들어갈 일이 있다. 뭔가 찾을 게 있거나 프린터를 쓰려고, 방 청소가 주된 이유다. 아주 드물게는 남편 방이 잘 있나, 살림살이가 나아졌나 궁금해서 가보기도 한다.


남편 방은 애초에 사무실 용도로 쓸 것을 생각하여 본채와는 나누어 배치했다. 기역(ㄱ) 모양으로 생긴 우리 집에서 작대기 하나를 맡고 있는 공간이다. 아예 분리된 건물은 아니지만 현관을 사이로 왼쪽은 남편의 방 겸 개인 작업실이고, 오른쪽은 거실과 부엌이다.


남편 방에 갈 때는 현관의 차디찬 타일을 맨발로 몇 발짝 딛거나, 널브러진 신발 중 하나를 밟고 간다. 몇 걸음 가려고 신발을 신기는 귀찮고, 점프해서 가기엔 내 다리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다. 발에 흙이 묻는 걸 싫어하는 아이는 자신의 뽀로로 슬리퍼를 대동하거나 엄마 아빠에게 겨드랑이를 들려 대롱대롱 매달려 간다.


남편은 이곳에서 못다 한 일을 하고, 노래를 듣고, 당근 마켓에서 산 핸들을 이용해 플레이스테이션도 한다. 벽에 붙인 큰 테이블에는 컴퓨터와 제도판을 나란히 두었다. 남편은 의자만 움직이며 둘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다. 창문 아래에는 그동안 만든 크고 작은 건축 모형이 있고, 원형 테이블에는 건축 책을 쌓아 놓았다.


나는 주인 없는 방을 찬찬히 둘러본다. 남편 방에는 신기한 물건이 많다. 색깔별 두께별로 다른 트레싱지, 전동 지우개, 스케일이 많이 표시된 삼각자, 동그라미 세모 네모 모양의 모양자, 거리 측정기, 사람 모형, 자동차 모형, 진짜 공룡이 나온다며 아이가 좋아하는 오큘러스, 밤늦게까지 일하던 날 출출하면 먹으라고 내가 챙겨준 과자까지. 과자는 포장지를 뜯지도 않고 그대로다. 어떻게 과자가 옆에 있는데 안 먹을 수 있지, 하며 내가 대신 먹는다.



낮 시간의 남편 방



멋진 공간이지만 남편이 있을 때는 이 방에 잘 안 오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일하는 데 방해될까 싶어서지만, 자꾸 차 한잔하자며 불러 세워서는 이 얘기 저 얘기 하기 때문이다.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은 그렇게 시작된 대화를 한 시간이나 이어간다. 아이를 재운 후 내 시간을 가지려던 나의 계획은 틀어진다.


요즘 자기의 관심사, 앞으로 나아갈 일의 구상과 방향 등 이것저것 말하다가 한 시간을 오 분쯤 남겨두고 내게도 묻는다. '넌 오늘 어땠어?' 그럼 난 이때다 싶어 '나야 뭐 똑같지' 하고는 서둘러 나온다. 일단 들어가면 한 시간이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문밖에서 부르지 들어가는 건 삼간다.


오늘은 그럴 염려가 없으니 느긋하게 있는다. 문구류도 구경하고 책도 들춰보며 의자에 앉는다. 남편의 제도판 위에는 지금 설계 중인 건물이 그려지는 중이다. 대지에 어울리는 건물을 세우고 그 안의 공간을 구성하면서 남편이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 스케치 위에 빼곡히 적혀 있다. 아직은 물음표와 마침표가 많은 이 건물도 하나의 느낌표가 나타나야 끝이 날 기세다.


꼬리가 길면 밟힐 테니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손에 모아 남편 방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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