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치 Nov 16. 2020

기억 속의 첫 집

어릴 때 우리집에서 먹는 라면은 항상 ‘우리집 라면’이었다. 집 앞 슈퍼에 가서 엄마가 시킨 대로 “우리집 라면 주세요” 하면 아저씨는 실제로 ‘우리집 라면’이라고 쓰인 걸 주었다. 어린 나는 그게 라면 이름인 줄은 한참 뒤에나 알았다. 당시에는 어떻게 우리집을 알지, 우리집만을 위한 라면인건가, 갸우뚱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은 2차선 도로를 앞에 두고 난 작은 샛길 끝에 있었다. 오른쪽은 피어리스 화장품 가게, 왼쪽은 서울우유 대리점, 맞은편에는 세탁소가 있었다. 샛길이 골목길과 헷갈려서 가끔 모르는 사람이 집 마당에 들어오는 일이 생겨 아빠가 대문을 설치했다. 대문이 높고 빡빡해서 키가 작은 엄마는 대문을 오갈 때마다 무릎을 명치까지 들어올리며 힘들어했다.


우린 식구가 많았다. 할머니, 아빠, 엄마, 큰언니, 둘째언니, 셋째언니, 막내인 나까지 직계가족만 일곱 명이었다. 방 세 개 중 하나는 할머니와 셋째언니가 함께 썼고, 하나는 부모님이, 마지막 하나는 큰언니와 둘째언니가 함께 썼다. 난 공식적으로는 안방을 엄마 아빠와 함께 썼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이 방, 저 방 다니곤 했다. 언니들은 반기지 않았지만 언니방에서 늦게까지 놀고 싶어서 자는 척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안방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이면 언니들과 옥상에서 물놀이를 했다. 당시 옥상에는 공사하다가 나온 나무토막, 못 등이 한쪽에 뒤섞여 있었다. 신나게 놀던 나머지 바닥을 못 보고 나무토막에 박힌 못을 밟고 말았다. 못은 내 왼쪽 네 번째 발가락과 새끼발가락 사이를 그대로 관통했다. 놀란 언니들은 나를 집으로 데려왔다. 아빠는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아빠가 깨면 혼날 걸 염려해 언니들이 나를 빨간 담요에 눕히고 이 사태를 어찌할 건지 상의했다. 갑자기 당한 사고라 그런지 아픈 건 모르겠어서 언니들이 시키는 대로 빨간 담요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그러다 걱정이 됐는지 셋째 언니가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아빠를 깨워 내가 다친 걸 알렸다. 놀란 아빠가 자전거 뒷자리에 날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니 아마 여섯 살 무렵으로 생각된다. 아빠가 친구들을 동원해 원래 살던 집 바로 뒤에 새로 집을 지었다. 아빠와 아빠 친구 분들이 낮에는 벽돌을 쌓고 저녁에는 마당에서 왁자지껄하게 밥을 먹고 가셨다. 밤이 되면 몰래 나가서 그분들이 먹다 남긴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기도 하고, 담배꽁초를 주워서 입에 물고 뻐끔거리는 시늉을 했다.


 몇 개월 뒤 집이 완성되자 원래 살던 집은 세를 주고 우린 이사를 했다. 방이 하나 늘어 네 개가 되었지만 역시나 식구 수에 비하면 부족했다. 독방을 외치는 딸이 여럿이었다. 몇 번의 앙칼진 전투 끝에 방주인이 바뀌길 수차례. 결국 큰언니와 둘째언니가 결혼한 뒤에야 할머니방, 부모님방, 셋째언니방, 내방으로 정리되었다. 내가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는 내 방은 창고가 되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할머니방은 엄마가 썼다.


집은 넓어졌지만 아빠가 친구들과 야매로 지은 집이라 그런지 단열이 전혀 안 됐다. 여름엔 더워도 그늘이 있어 괜찮았지만 겨울이 고비였다.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닫아도 가만히 앉아있으면 선풍기 미풍을 틀어놓은 듯 머리카락이 산들거렸다. 추위를 많이 타는 아빠는 이불을 끌어안고 다녔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수록 집도 노쇠해갔다. 벽이 여기저기 갈라지고, 둘째 언니 결혼 전에 급하게 칠한 기와도 색이 바래 얼룩덜룩해졌다. 세 놓는 집들이 있어 월세 수입이 꽤 쏠쏠했지만 임차인들과의 마찰에 부모님도 지쳐가던 차에 집이 뜯긴다는 얘기가 나왔다. 원래 우리 동네가 문화재 자리였는데 사람들을 이전시키고 문화재를 다시 복원해 공원화한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에 있던 터라 집이 뜯기는 걸 보진 못하고 나중에서야 공터로 변한 우리집 자리를 봤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집을 보니 그곳에서 지낸 20여 년이 빠르게 지나갔다. 근처를 지날 때면 마음이 서글퍼졌다.


부모님의 젊은 시절과 우리 네 자매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묻힌 집이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뒤섞여 그 집은 내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내방 문을 걸어 잠그고 울던 날도 있었고, 큰언니가 결혼할 때 함을 지고 온 형부 친구들이 안방에서 왁자지껄하게 술판을 벌이던 축제의 기억도 있다. 엄마 아빠는 그 집이 헐릴 때 시원했을까, 섭섭했을까.


부모님은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 생각보다 잘 적응하시는 것 같다. 차를 몹시 아끼는 아빠는 특히 지하 주차장을 애정하신다. 엄마도 복잡한 아파트 시스템을 나름의 방식으로 익히셨다. 예전엔 겨울이면 너무 추웠던 생각밖에 안 나는데 지금 아파트는 일 년 내내 쾌적하고 주차하기도 좋아서 딸들도 만족해한다.


예전 우리집이 아예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서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치로 된 현관과 한겨울 혼자 자전거를 타던 넓은 마당, 엄마가 아빠 몰래 고양이에게 밥을 주던 옥상은 쉽게 잊기 힘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