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정부 출범 후 망중립성 정책 폐기 논란 갈수록 격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촉발된 ‘망중립성’(network neutrality) 폐지 논란이 최근 들어 더욱 격화되고 있습니다. 망중립성 폐지를 주장해온 통신사들과 공화당, 트럼프 행정부, 아짓 파이 연방통신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 Commission, FCC) 위원장이 전방위로 '망중립성 폐지' 고삐를 죄어오자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주요 인터넷 기업들과 민주당, 시민단체들이 '망중립성 유지'를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선 상황입니다.
WSJ "아짓 파이, 5월 중 망중립성 폐지 계획 발표할 듯"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월 16일(현지 시각)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이 오는 5월 망중립성 폐지 계획을 발표할 것”이라 보도했습니다. 현재 3명의 FCC 위원들 중 민주당의 미뇽 크리번 의원의 임기가 오는 6월 만료되면 정족수(3인) 부족으로 망중립성 폐지를 밀어붙이기 어려워지고, 2018년 중간선거 전까지 망중립성 이슈를 풀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에 이른 시일 내에 아짓 파이 위원장이 폐기 수순에 돌입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반면,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트위터 등 미국 내 인터넷 기업들을 대변하는 ‘인터넷 협회(Internet Association)’는 지난 4월 11일(현지 시각) 아짓 파이 위원장을 방문해 현재의 망 중립성 원칙을 훼손하지 말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전달했습니다. 망중립성을 지지해온 미국 시민단체들과 민주당에 이어 실리콘 밸리 내 주요 인터넷 기업들까지 공개적으로 망중립성 원칙 유지를 요구하고 나선 상황입니다.
AT&T 등 대형 통신사들, 콘텐츠 사업 진출 위해 반드시 넘어야할 장벽?
현재 미국 내에서는 아짓 파이 위원장이 실제로 망중립성 원칙을 폐지하려면 연방항소법원의 ‘망중립성 정책 합법' 취지 판결, FCC의 내부 절차, 시민단체와 시민들의 비판 여론, 인터넷 기업들의 법적 투쟁, 의회 내 민주당과 망중립성 찬성 공화당 의원들의 반발 등 수많은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망중립성 원칙'은 컴캐스트(comcast), 스펙트럼(Spectrum), 버라이즌(Verizon), 센츄리링크(Century-Link), AT&T 등 미국의 거대 통신사들이 통신산업 규제 완화뿐만 아니라 콘텐츠 사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으로 인식되고 있어 이들이 망중립성 폐지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반론도 상당합니다.
망중립성은 모든 인터넷 네트워크 사업자(Internet Service Provider, ISP)들이 인터넷 트래픽을 차별없이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망중립성은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된 200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사실 꽤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개념입니다. 미국은 1934년 통신법(Communication Act)을 통해 '누구나 통신망에 접근할 수 있는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통신 사업자들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FCC에 부여했습니다.
이어 1980년대 초 전화와 컴퓨터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부가 서비스들이 등장하자 이들 서비스를 연방정부 규제를 받는 카테고리(전화, 항공, 도로 등)에서 분리시켰지만 1996년 기존 통신법을 개정한 새로운 통신법(Telecommunication Act)을 제정하면서 이들 서비스를 ‘보편적인 서비스 제공자(Common carrier)’로 규정하며 다시 연방 정부의 관할권 내로 포섭했습니다. 반면, ISP들은 당시 ‘정보 서비스(Information Service)'로 분류돼 연방 정부의 관할권을 받지 않는 사업군으로 규정됐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터넷망을 전화나 도로망과 유사한 공공재(public utility) 성격으로 보지 않았던 셈입니다.
‘망중립성’이라는 용어는 2003년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미국 콜롬비아대 로스쿨의 팀 우(Tim Wu) 교수는 망중립성이란 용어를 통해 ‘망이나 이용자에게 해가 된다는 증거가 없다면 통신 사업자는 트래픽을 차별할 수 없다’라는 원칙을 제시하였고, 이 무렵부터 미국과 유럽에서 망중립성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했습니다.
망중립성 논의 논의가 더욱 진전되는 가운데 2010년 FCC는 망중립성 주요 개념과 원칙들을 담은 오픈인터넷 규칙(Open Internet Rules)을 발표하며 ISP 규제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트래픽 차별 및 차단 금지, 합리적 망 관리 등을 골자로 하는 오픈인터넷규칙은 FCC가 공식적으로 망중립성 원칙을 대외에 천명한 첫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FCC는 버라이즌(Verizon)이 제기한 소송에서 연방순회항소법원이 “ISP가 타이틀I '정보 서비스'로 분류되어 있는 한 FCC가 규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함에 따라 한발짝 물러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FCC는 오히려 이 판결 내용을 근거로, ISP를 FCC의 관할권 범위 내인 ‘타이틀II’ ‘통신 서비스(Telecommunication Service)로 재분류한 뒤 2015년 오픈인터넷규칙을 다시 통과시켰습니다. 우여곡절을 거치긴 했으나 망중립성 원칙과 관련된 의무들을 정식으로 ISP에 부과하고, 이에 근거해 관련 규제 정책을 펼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셈입니다(참고: 망중립성의 역사 인포그래픽 A Brief, Unfolding History of Net Neutrality (Infographic)).
하지만 망중립성 반대 입장을 밝혀온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2016년 11월 제45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올 1월 차기 FCC 위원장에 아짓 파이가 임명된 이후 제로레이팅 요금제 조사 중단, 저소득층 초고속인터넷 지원 중단, ISP에 적용되는 새 프라이버시 법안 제정 연기 등 ISP들에게 유리한 결정들이 잇따르면서 ‘망 중립성' 폐지 논쟁은 2017년 다시 재점화되는 모양새입니다.
아짓 파이는 FCC 위원장으로 임명된 직후부터 ISP를 전화나 전기와 같은 공공재 산업으로 분류한 FCC의 결정과 망중립성 정책을 변경하겠다는 의사를 꾸준히 표명해왔습니다. 하지만 미국 내 전문가들 의견에 따르면 2016년 워싱턴 D.C 항소법원이 이미 망중립성 관련 규정에 대해 합법 판결을 내린 바 있어 아짓 파이가 망중립성 원칙 폐지나 제한에 나설 경우 지루한 법적 공방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존재합니다. 우회적인 방법으로 아짓 파이가 위원장 자격으로 망중립성 원칙 폐기 명령을 발동할 수도 있지만 행정적인 측면에서 적법 절차(Due process)를 어겨가며 이 같은 명령을 발동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버라이즌의 법무 임원 출신인 아짓 파이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규제 관련 프레임워크를 주의 깊게 검토 중"이라고 밝히는 등 구체적인 실제 조치나 강행 수단에 관해서는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일각에서는 FCC를 건너 뛰어 공화당이 의회 내에서 FCC 권한을 제한하는 입법을 시도할 수 있다고 전망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민주당 반발이나 공화당 내의 일부 반대 목소리를 감안할 때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안으로 꼽힙니다. 소수 의견이긴 하나, 아짓 파이가 FCC 위원장으로 취임한 후 행한 주요 조치들, 예를 들어, 제로레이팅 조사 중단, 새 프라이버시 법안 제정 연기 등은 망중립성 폐지 수순이라기보다는 기존 규제의 완화나 철폐 차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할 때 아짓 파이 위원장이 망 중립성 원칙을 완전히 폐지할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그 대신에 트래픽 속도 차등이나 특정한 조건 하에서 데이터 사용을 제한, 지연(throttling)을 허용하는 등 망 중립성 원칙을 ‘일부 완화’하는 전략을 채택할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합니다.
정부 개입 최소화를 주장해온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도 트럼프 당선을 계기로 최근 망중립성 논쟁에 가세하고 나섰습니다. 통신사들이 트래픽을 마음대로 통제할 것이란 경고는 처음부터 과장된 '가짜 경고(fake warning)'였고, 현재의 망중립성 정책은 정부에게 인터넷 통제권을 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를 시장에 돌려줘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망중립성 폐지나 완화를 주장하는 진영에서는 미국 통신망 산업 자체에 내포된 한계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아짓 파이 위원장 입장에서는, 네트워크망이 여전히 부족한 시골 등 낙후 지역에 망 설비를 확대 구축하도록 촉구할 '당근'이 필요한데, 신규 투자 지역 내 독점이나 가격 책정권을 직간접적으로 보장해주는 방식 등이 구체적인 대안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ISP를 일종의 공공서비스 제공자로 해석되는 '커먼 캐리어(common carrier)'로 묶어 놓은 채 민간 기업들에게 신규 투자를 독려하는 것은 다소 모순이라는 지적들이 뒤따릅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이 결코 인터넷 국유화 등에 기반하고 있진 않습니다. 오히려 이용자(end-user) 접속망 단계를 개방해 이 구간에서 ISP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구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식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튜브 트래픽 속도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지역 ISP가 있으면 이용자들이 해당 ISP를 떠나 얼마든지 다른 소매형 지역 ISP를 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자는 식입니다. 이런 류의 대안들을 살펴보면, 결국 미국 내 망중립성 논란은 단순히 개념적 논쟁을 넘어서 미국 통신망 산업의 현실과 다각도로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완 달라"... 망중립성 논쟁서 한발 비껴선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최근 다시 촉발되고 있는 '망중립성' 논쟁에서 눈에 띄는 점은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 거대 인터넷 업체들이 과거 망중립성 논쟁 초기 때와 비교해 눈에 띄게 소극적인 입장이라는 사실입니다. 협회를 통해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모양새를 갖추긴 했지만 개별 기업별로 들여다보면 조금씩 입장이 엇갈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구글은 대중에게 각인된 '인터넷 대변자' 이미지와 달리 2010년부터 유선망인 구글 파이버(Google Fiber)와 무선망인 안드로이드와 프로젝트F(Proejct F) 서비스에 뛰어들면서 망중립성 논쟁에 거리를 두는 모양새입니다. 넷플릭스 역시 글로벌 시장 지배력을 키운 후로는 망중립성 이슈에 대해 예전만큼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은 한 때 인도에서 제로레이팅을 주도하며 오히려 망중립성 개념을 훼손시키는 활동을 해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망중립성 논란은 2015년 오바마 정부 하에서 법제화로 가닥이 잡히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올해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고, 통신사들이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콘텐츠, 미디어 사업 분야 진출을 가속화함에 따라 '망중립성' 폐지를 둘러싼 논쟁은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향후 논쟁은 망중립성의 이론적 개념들을 뛰어넘어 통신과 콘텐츠 산업의 융합 등 기술 발전에 따른 산업구도의 재편, 미국 내 정치 지형의 변화, 글로벌 OTT(Over The Top, 인터넷으로 TV를 시청하는 종류의 서비스) 기업의 출현 등의 이슈들과 얽혀 그 전선(戰線)이 더욱 복잡다단한 양상을 뛸 것으로 예상됩니다.
[1] 김기창, ‘망중립성 논의의 법적 측면: 미국과 영국, 그리고 한국의 경우’ 2012.6.19 슬로우뉴스 http://slownews.kr/3854 .
[2] Kathleen Ann Ruane, Net Neutrality: Selected Legal Issues Raised by the FCC’s 2015 Open Internet Order,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2015.6.12. https://fas.org/sgp/crs/misc/R43971.pdf
[3] IT전문매체 기즈모도 기사, ‘The Republican Plan to Kill the Open Internet,’ 2017.4.17
http://gizmodo.com/the-republican-plan-to-kill-the-open-internet-1794228758
[4] ‘Google, Facebook, Netflix lobbyist tells the FCC not to destroy net neutrality’ The Verge, 2017.4.12
http://www.theverge.com/2017/4/12/15270928/internet-association-fcc-net-neutrality-meeting-ajit-pai
[5] Larry Downes, ‘The Tangled Web of Net Neutrality and Regulation’, 2017.3.31.,
https://hbr.org/2017/03/the-tangled-web-of-net-neutrality-and-regulation
[6] http://crescentvale.com/2017/04/look-rewriting-rules-net-neutrality-change-internet/
http://crescentvale.com/2017/04/look-rewriting-rules-net-neutrality-change-internet/
[7] '데이터 무료' 망중립성 위배 논란, 주간경향, 2017.4.12.
http://v.media.daum.net/v/20170412100912191
[8] 이금호, '제로레이팅 서비스로 살펴본 망중립성과 소비자 후생,' 소비자정책동향, (75), 2016.11., 1~15.
[9] A Brief, Unfolding History of Net Neutrality (Infographic), Entrepreneur, https://www.entrepreneur.com/article/235335, 2014.7.2.
[10]'If You Want To Save Net Neutrality, Don't Bother Waiting For Google, Netflix Or Facebook's Help' 2017.4.17. http://www.hypebot.com/hypebot/2017/04/if-you-want-to-save-net-neutrality-dont-bother-waiting-for-google-netflix-or-facebooks-hel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