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속도전이 아니다
속도전이 되어버린 삶
영화는 폭주족들의 폭주 장면으로 시작된다. '퀵'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영화에는 '퀵 서비스맨'이 등장한다. 그는 한때 폭주족이었고, 폭주족들 가운데서도 전설이 된 남자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어진 업무에 충실했을 따름인데, 빌딩이 무너지고 경찰은 그를 쫓는다. 추격이 시작된다. 살기 위해 달려야 하는 퀵서비스맨과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 그의 뒤를 쫓는 경찰과의 추격전은 영화의 후반부까지 팽팽하게 이어진다.
이 영화는 폭주족이었던 사람과 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이 그를 이용해 자신을 이용한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고, 그에게도 복수하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퀵서비스맨은 쉬지 않고 달린다. 이유는 단 하나. 살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입힐지도 모를 (다른 이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폭탄을 배달해야 한다.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언제부턴가, 현대인들의 삶은 '속도전'이 됐다.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은 없을지라도, 뒤를 돌아보면 그 순간 추격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빽빽한 세상이 됐다. 앞만 보며 내달리는 삶에 쉼표가 존재할 수 있을까? 쉼표를 빼버리고 달리는 삶의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가끔 인도의 보도 블럭 위를 달리는 배달의 기수들을 볼 때면 왜 위험하게 인도로 달리며 보행자의 보행을 방해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고 화가 났다. 인도는 사람이 다니라고 낸 길이 아닌가? 그러다 알게 됐다. 피자를 늦게 배달하면 월급에서 돈이 깎이며, 그들에게 1분 1초는 그만큼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사실 그런 사실도 언론에서 보도한 이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시급을 깎이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위험한 곡예를 펼쳤던 것이다. 사실 음식 배달은 시간이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배달을 시킨 손님이 식어빠진 음식을 먹어야 할테고 그렇게 되면 가게 이미지에도 안 좋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당연히 손님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 점주는 배달원에게 조금 더 빨리 배달하라고 독촉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런 위험한 곡예가 펼쳐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원인은 하나다. '돈'때문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시간을 시장에 내다 판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돈을 얻는다. 시간을 내다 팔 수 없는 사람은, 무능력한 인간(잉여인간)으로 분류되며 바쁘면 바쁠수록, 자신의 시간이 완판될수록 시장에서 인간은 그 가치를 인정 받고 몸값이 올라간다. 그러니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일에 매진한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여가 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일에 매진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한국이나 일본은 그런 점에서 워커홀릭의 나라로 비춰진다.
반대로 중국인들은 게으르다는 인식이 강하다. 실제로 중국에 공장을 차리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있는 측근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매사에 느긋하며 일을 좀 느리게 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건이 제 날짜에 만들어지지 않을 때가 많아 속이 터질 때가 많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중국인을 비난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인적 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그것이 한때 우리의 유일한 경쟁력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한국인들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며 대체로 성실하다. 그것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휴식할줄 모른다는 점에서 보면 단점이 되기도 한다. 늘 빨리빨리를 외치니, 횡단보도에서도 제대로 멈출줄 모른다. 1분 1초가 소중하며 그 시간을 조금 더 생산적인 일에 써야 뭔가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오락영화이고 지극히 상업적인 대중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이민기의 모습에서나 살아남기 위해 헬멧을 벗지 못하고 그것을 쓴 채로 샤워를 하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에서 '살기 위해 오직 달려야만 하는' 사람의 슬픔 같은 것이 보인다.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다. 하지만 내일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며 오늘을 버리거나 과거에 집착해 오늘을 버린다면 -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며 바꿀 수 없고, 내일은 오늘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아직 오직 않은 시간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오늘'뿐이다.
이 영화 속에는 과거에 집착하며 오늘의 행복을 포기한 인간(윤제문)과 오직 순간의 즐거움만을 위해 살았던 인간(이민기)이 등장한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순간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살았던 인간은 과거에 발목이 잡힌다. 그래서 미래에 단지 살아있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려야만 하며, 과거에 집착한 인간은 오늘과 미래를 버리고 복수의 덩어리가 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인간은 순간의 즐거움만을 위해 살아서도 안 되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나 지나가버린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도 안 된다. 인간은 오직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 홀로 서 있어야 하며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 자신을 단단히 붙들어 매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도 오고, 과거도 과거로 남는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오늘만이 살아있는 진짜 시간이니까. 오늘 행복해야 하니까.
인간의 생명은 무한하지 않다.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런 점에서 개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숨통을 시시각각으로 죄어오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언젠가는 불꽃을 일으키며 사라질. 이 영화 속에서 순간의 즐거움만을 쫓던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죽음까지 각오한다.
생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값어치 있게 쓰려고 한 남자가 그 선물로 받은 것은 조금 더 의미 있는 삶, 새로운 시간 그 자체였다. 그것이 그에게 어떤 미래를 선물할지 관객은 알 수 없지만, 그의 무의미했던 끊임없이 달리기만 했던 시한폭탄과도 같은 시간이 이후에는 조금 더 천천히, 여유롭게 흐르는 그 자신만의 시간으로 변해 있을 거라는 점에서 어떠한 희망을 느끼게 만든다.
남과 같은 속도로 달리기 위해 나만의 속도를 잃어버리진 않았는가? 나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었는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 이 영화는 단순히 오락영화로만은 남지 않게 되었다. 재미있으면서도 뭔가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영화라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