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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Nov 22. 2016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에 일어난 스가모 어린이 유기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는 그나마 덜 충격적인 편이다. 실제 사건은 더 잔인하고 참혹하다.


영화는 젊은 여자가 한 아이를 데리고 새 집으로 이사를 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여자의 짐 중엔 큰 트렁크 가방이 세 개나 된다. 집 주인은 어린이가 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자는 트렁크에 다른 세명의 아이들을 넣어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트렁크에 들어가지 않는 여자 아이 한명은 다른 곳에서 기다리게 하고 큰 아이에게 살짝 데리고 들어오게 한다.  
 
큰 아이의 이름은 아키라 (아키라 역을 맡은 배우 야기라 유야는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의 아이지만, 아키라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아니, 다니지 못한다. 경제력이 없는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또 아이들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그녀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 했다고 하더라도 갈 수 없는 처지였다. 넓은 집을 구할 수가 없었던 그녀는 집 주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이들을 집 안에서만 생활하게 한다.


백화점 매장 직원의 월급만으로는 네 아이와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다른 네명의 아이를 여자의 몸으로 홀로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녀가 어느날 잠을 자면서 눈물을 흘린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실제 사건 속의 어머니는 더 잔인한 여자였던 것 같지만)
 
그녀는 떠나기 전에 아키라에게 "나도 좀 행복해지면 안되냐"는 식의 말을 한다. 그런 것만 봐도 그녀가 아이들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녀도 행복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더. 그래서 과거에도 여러명의 남자를 만나고 관계를 맺지만, 그 관계는 모두 실패로 끝나버렸고 그녀는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들로 인해 네명의 아이를 가진 싱글맘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임신시킨 남자들은 모두 자신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면서 모른척 한다.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아키라의 엄마는 꽤 여러명의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졌던 것 같고 사생활이 문란했던 여자인 것 같다.
 
그러니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아이를 아이 아버지에게 당신이 키우라고 맡길 수도 없었던 것 아닐까? 그녀는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양육의 책임을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떠안은 짐짝 정도로 생각하고 대했던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생각이 '트렁크'에 아이를 담아 옮기는 장면으로 드러난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영화 아무도 모른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고, 아이들을 아파트에 버린 채 달아난다. 엄마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네 명의 아이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웃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편의점 직원의 도움으로 유통기한이 얼마남지 않아서 판매할 수 없는 삼각김밥 (원래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해서 판매할 수 없는 (아침에만 잠깐 판매할 수 있는) 삼각 김밥 같은 건 편의점 알바생에게 간식으로 지급되는 것이 보통이다.) 같은 것을 양동이에 받아 그것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엄마가 돌아오리란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은 채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을 찾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새 가정을 꾸린 엄마는 아이들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엄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러나 아무도 엄마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울면서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일상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채로 고요하게 흘러간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죽고, 아키라는 그 아이를 공항 근처에 묻는다.
 
영화는 죽은아이(유키)를 공항에 묻고 돌아온 아키라가 동생과 함께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아키라와 그의 동생들이 울지 않고 필사적으로 웃었던 것은 살아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야만 하니까. 그래서 애써 덤덤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현실을 받아들였던 것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더 아픈 영화였다. 눈물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한쪽이 저릿 저릿했다. 삶이라는 건 참 잔인한 것이다. 때론 철부지 어린이들에게까지도. 삶은 지옥 같을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금 더 커서 알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고 그렇게 아픈 것이라는 사실을. 사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것이다.


그 무관심이 어쩌면 저 아이들을 외로움과 배고픔 속에 방치해둔 것은 아닐런지...그 아이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 그래서 영화 제목인 '아무도 모른다'가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 그 무엇보다 크게 마음을 울리는 영화라는 사실이, 참 많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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