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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Dec 09. 2017

밤의 피크닉

함께 길을 걷는다는 것

뭔가가 끝난다. 모두 끝난다.
머리 속에서 빙글빙글 여러가지
장면들이 잔뜩 돌고 있지만,
혼란스러워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고 다카코는 중얼거린다.
뭔가의 끝은 언제나 뭔가의 시작이다.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영화는 온다 리쿠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영화로 만들어지기 상당히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개인적으로는 무척 궁금했었다.  잘못 만들면 상당히 지루한 영화가 될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에 재밌는 장면을 넣어서 지루하지 않게 잘 만든 것 같다. 영화로 만들어지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이유는 줄거리로만 보면 뭐, 그리 큰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영화로 만들어지기엔 볼거리가 다소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은 졸업을 앞두고 있는 타카코와, 니시와키 토오루로 같은 반에 재학 중인 이복남매다.  주인공들이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는 남녀 공학으로, 이 학교에는 오랜 전통 행사인 단련 보행제가 있다.
 
단련 보행제가 뭐냐면 말 그대로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보행을 하는 것으로 밤새도록 걷는 거다. 군인들이 행군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굉장히 먼 거리를 이틀에 걸쳐 걸어야 하는데다 전교생이 참여하는 큰 행사기 때문에 낙오되는 학생들을 위해 응급차와 중간 중간 목이 마르지 않도록 음료수를 나눠주는 행사 진행 학생들을 배치해 무리하지 않고 보행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있다. 학생들은 이 행사를 좀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고 축제처럼 즐긴다. (뭐, 일부 학생들은 강제성이 있는 행사에 반감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행사가 끝날 무렵에는 뭔가 가슴 뭉클한 무언가를 느끼며 친구들과의 우정을 돈독히 하기도 하는 그런 학교의 행사로 원작 소설에 묘사되어 있다.)
 
국내에도 소설에서처럼 이런 행사를 하는 중, 고등학교가 있다면 좀 특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국토대장정이라는 게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서...
 
앞서 말했듯이,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서로 말도 섞지 않고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이복 남매가, 학교의 큰 행사인 단련 보행제에서 함께 걸으며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진실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영화 역시 그러한 기본 줄거리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줄거리는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는데 반해 이 책의 원작 소설은 무척이나 두꺼운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용 역시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사건 위주로 가기 보다는 뭐랄까. 서로 다가가고 싶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남녀 주인공의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심리 묘사가 굉장히 탁월하다.
 
그리고 그러한 심리를 가지고 갈등을 만들고 이야기를 진행 시키고, 풀어나가기 때문에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했을 때 등장 인물 간의 갈등이 어떻게 표현될까 하는 부분이 가장 궁금했다. 소설과 영화는 기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확실히 많이 차이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원작의 느낌대로 잘 표현되어 있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소설만큼이나 영화 역시 마음에 들었다.
 
 
'걷는 일'을 우리는 흔히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길들과 만나는 것이고, 그 길은 오로지 혼자 걸어야만 하는 외로운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토다가 했던 말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우리가 지나온 그 시간은 과거로 변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또는 하지 않든 시간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만 흐르기 때문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길 위에 시간을 떠나보내는 일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자기의 시간을 살고 있다. 언젠가는 과거로 변할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니시와키와 타카코 역시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보행제가 끝나면 곧 졸업이고 졸업하면 곧 만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이야기할 기회를 잃어버린 채로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껄끄러움이 남아 있는 채로  앞으로 많은 시간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타카코는 속으로 내기를 하고 그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한다.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니시와키 역시 마찬가지다. 니시와키 입장에서는 바람을 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망할 아버지가 엉뚱하게도 죽어버린 이후 원망할 대상조차 잃어버린 니시와키는  자신과 같은 나이의 여자 아이와 남매라는 사실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니시와키 역시 타카코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표면적으로 보면, 니시와키는 타카코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게 행동하고 그러한 행동은 타카코에게 어떠한 죄의식을 안겨준다.
 
니시와키는 다카코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알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어쩌면 니시와키는 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엉켜버린 관계의 실타래 때문에 니시와키와 타카코는 고민한다. 그렇다고 서로를 쉽게 외면하지도 못한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밤의 피크닉은 밤에 걸으면서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이복 남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작은 오해로 멀어진 누군가와 마음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용기를 내고 다가서고 그리고 받아들여지는 우리들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 영화이기도 하다.
 
단지 걸을 뿐이지만, 함께 걷는다는 행위 속에 담긴 그 많은 의미들이 보물처럼 차곡차곡 담겨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나니 몇년 전 좋아했던 사람과 헤어지기 싫어 밤새 길을 걸었던 생각이 난다. 그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이젠 모두 잊혀져 기억나지 않지만 그 밤의 공기와 그 분위기는  아직도 내 마음 속에 깊게 남아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또 다시 누군가와 밤새 길을 걷고 싶어진다. 그때처럼.


지금은 지금이라고.
지금을 미래를 위해서만 쓸 수는
없다고.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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