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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Apr 08. 2018

남아 있는 나날

살아있기에 희망은 있다

책 표지를 보며 책을 다 읽고 나면 표지에 회전 의자 세 개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도 표지에 회전의자 세 개가 의미하는 바는 잘 모르겠다. 하루를 인생에 비유하면 아침은 청년, 점심은 중년, 저녁은 노년 쯤 되지 않을까. 그래서 저 의자도 청년, 중년, 노년의 삶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짐작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노년의 집사이다. 집사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기보다는 그냥 집사로서의 역할, 그 자체에만 충실하며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일에는 무관심하다. 그는 주변인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고 자신의 역할인 집사 역할에만 충실하며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에 어떤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삶이 소설 속에서는 달링턴 홀에서 총무로 일 하다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 켄턴 양과의 삶과 대비돼 그려지고 있다.

그는 새롭게 모시게 된 미국인 신사 패러데이 어르신이 준 6일간의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는 자신이 충실하게 모시며 그 분을 모시는 데에서 자긍심을 느끼게 했던 전 주인인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디.

“그 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셨어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는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알겠습니까?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299쪽)
 
그러나 곧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301쪽)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의 합리화는 곧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에서 출발한 것일 것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은 듯한 그를 위로하며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309쪽)라고 말한다.

하지만 노년의 그에게 삶은 하루의 끝을 의미하는 저녁일 수도 있지만 저녁은 다음날을 위해 준비하며 휴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살아있기에 아직 변화될 여지는 충분하다.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은 자신의 과오를 깨달은 그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나갈 것인지를 희망적으로 그리는 제목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사로서의 품위는 갖추었지만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갖추는 데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삶. 모스콤 주민인 해리 스미스 씨가 그에게 던진 다음과 같은 말.


지금 정치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하는 얘기예요.
사람이 노예가 되어서는 품위를
갖출 수 없는 법입니다.
(231쪽)


이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주변인인가, 아니면 내 삶의 주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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