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미친 양언니(최다니엘)로 불렸던 '양수경'이 상갓집에서 술을 먹고 잔뜩 취한 상태에서 작가에게 감독인 손규호(엄기준)의 뒷담화를 까서 손규호를 물 먹인 후 엄청 얻어터진다. 사실 조연출인 양수경도 손규호를 때렸다.
서로 치고받고 싸운 후 조연출들 불러 모아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단체로 파업하자고 꼬드겼다가 실패하고, 촬영장에 늦게 나가는 바람에 감독에게 잔뜩 깨지고 동기까지 와서 뭐라 그런 후에 그와 트러블이 잦은 오민숙(윤여정)이라는 여배우가 그의 상의 주머니에 껌을 넣어주는 장면.
그때 촬영장에서 선생님으로 불리는 오민숙이라는 여배우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난 그녀가 마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씹고 싶으면 껌이나 씹어
세상 어디나 위와 아래는 존재한다. 회사도 마찬가지고 학교도 마찬가지다. 위로 올라갈수록 힘이 생기고, 아래에 있을수록 고달픈 것이다. 그러니 다들 어떻게 해서든 위로 올라가려고 한다. 아무도 자신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리로.
양수경은 조연출이다. 그의 자리는 언제든 대체가 가능하다. 그러나 감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를 이끌고 가야 하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수경은 상갓집에 가서 술을 잔뜩 마시고, 작가에게 감독 뒷담화를 한다. 그것도 감독이 보는 앞에서.
뒷담화는 뒤에서 담화를 하는 것이다. 담화에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뜻 이외에도 한 단체나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한 견해나 태도를 밝히는 말이다. 그러니 뒤에서 단체나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한 견해나 태도를 서로 이야기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여러 명이 남의 이야기(주로 욕)를 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이 말은 널리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표준국어 대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은 말이다.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만큼 잘 만들어진 합성어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본래의 의미 대로만 사용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점만 보이고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이기도 하다. 미운 털로 온몸을 치장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한 번 미운 털이 박히면, 여간해선 그 미운 털을 뽑기가 어렵다. 엄청난 노력을 한다면 첫인상을 뒤집을 수도 있긴 하다. 짧은 시간 안에 어떤 사람의 진면목을 다 알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어떤 잘못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쁜 사람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무척 슬픈 일이다. 미운 털이 박힌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스트레스도 받을 것이고 상처도 받을 것이다. 사람은 받은 만큼 되돌려주고 싶은 심리가 있다.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 잘 웃어주는 사람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역시 이런 심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게 나쁘게 대하는 사람을 잘 대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일들이 내 마음 가는 대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수평적 관계가 아닌 상하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 오는 스트레스를 뒷담화로 풀게 된다.
앞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권력이 개입되어 있는 관계의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내가 아래에 있을 때 나보다 힘이 더 있는 상대를 앞에서 대놓고 씹어대는 것은 위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듯 술을 먹고 곤드레만드레 취한 다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특히 생계가 달려 있는 직장에서라면 바로 다음 날 회사에서 나가달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미친 양수경은 절대 보이지 말아야 할 본심을 내보였다가 직장에서 해고될 위기에 처하지만 생계 때문에 꾸역꾸역 촬영장을 나간다. 그리고 싹싹 빈다.
상하 수직적인 관계에서 그를 계속 기용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감독인 손규호에게 있기 때문이다.
손규호는 그를 받아들인다. (물론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처음엔 그를 내치려고 하지만 미친 양언니가 복직한지 얼마 안 됐고, 싹싹 빌기도 하니까 두고 보기로 한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심정을 다 안다는 듯, 아무런 말없이 그의 상의 주머니에 여배우는 껌 하나를 넣어준다. 뒷담화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특히 내가 아래에 있다면.
그러니 껌이나 씹으라고 오민숙은 껌을 넣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뒷담화에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공공의 적이 된 누군가를 함께 씹어대며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니까. 뒷담화는 필요악이지만, 때로는 꼭 필요한 약이 되기도 한다.
스트레스 해소제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말이다. 사실 누구나 크고 작은 문제와 고민들을 안고 살아간다. 편하고 쉽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치열하게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니 그 속에서 겪는 스트레스가 오죽하겠는가. 그것을 뒷담화로 푼다고 해서 그게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뒷담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자신이 뒷담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물론 상처도 받긴 하겠지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이를 통해 갖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 대한 화를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쏟아내면서 푸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건전하고 즐거운 방식으로 여가생활을 즐기면서 풀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도 있지만,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를 더 주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이 말은 미운 사람을 미운 감정으로 대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일 텐데... 미운 사람은 그냥 밉지, 갑자기 좋아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뒷담화의 순기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내 기준에서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앞담화다. 앞담화는 앞에서 대놓고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을 말한다. 조용히 얘기한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 다 들리거나, 그 뒷담화의 대상에게까지 들리면 그게 바로 앞담화다.
험담이라는 것은 같지만 좀 다르다. 뒷담화는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 앞에서는 절대 할 수 없지만, 앞담화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앞담화를 하는 사람과 담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관계를 고양이와 쥐에 비유한다면, 앞담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고양이가 아니라 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앞담화는 뒷담화보다 더 비열하고 더럽다. 그것은 단순히 스트레스를 해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험담의 대상이 되는 이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누군가의 뒷담화 쯤 한두 번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사실 뒷담화를 한다고 해서 감정의 앙금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분노는 뒷담화를 하면서 더욱 증폭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이나 미움의 마음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럴 때 뒷담화는 누군가에 대한 미움으로 평정을 잃고 혼탁해진 마음을 씻어내는 행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뒷담화는 하고 나면 꼭 후회하게 된다. 뒷담화하는 장면을 뒷담화 대상에게 들키거나, 주변 사람에게 들켰을 때가 그렇고 며칠 지나면 왠지 후회를 하게 된다. 마음에 남아 있는 찝찝함 때문이다. 왠지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뭔가 부끄러운 일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때는 흥분해서 그렇게 말했지만, 며칠 지나 찬찬히 뒤돌아 보면 그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이었나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그렇게 약하고, 동시에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매일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착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누군가가 나에게 나쁜 사람이 될 수 있고,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은 뒷담화는 가급적 하지 말자는 것. 어쩔 수 없이 또 상처받은 마음을 뒷담화로 풀어내는 일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계속 노력하자는 것이다.
남에게 늘 좋은 사람이어야 할 필요도 없지만 굳이 뒷담화를 하다가 들켜 나쁜 사람으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 또한 뒷담화의 대상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행한 일일지도 모르니.
그리고 깊이 사귀어보면 나쁜 사람 하나도 없더라. 그러니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얼마만큼 주어졌느냐의 차이로 일어나는 일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이해하기에는 단지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