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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Oct 01. 2018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해야 하는 슬픔에 관한 공부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8쪽_신형철)

몇 년 전에 어떤 사람을 위로하려 했던 적이 있다. 아버지를 잃은 기혼 여성이었다. 나 역시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내가 그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어설프게 위로하려 했고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결혼을 하는 것도 보았고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후에 곱씹어볼 추억이 많이 쌓여 있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런 추억이 있기에 더 슬플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어떤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과 내 경험이 완전히 같을 수도 없고 그 슬픔의 깊이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후로 어설픈 위로보다는 침묵을 택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일을 통해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타인을 슬프게 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오히려 그 타인의 슬픔에 무감각해질 수 있으며 그 이유가 원인을 제공한 자가 본인이라 추궁 당하는 느낌을 받아서라고도 나와 있는데 이와 비슷한 경험 역시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나의 내밀한 슬픔을 이해 받으려 했던 적이 있다. 단지 어떤 사건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게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상처 받은 것 같았고 나는 그 사람을 추궁할 생각이나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내가 그 사람을 상처 입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가 추궁 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사과를 했지만 나는 어떤 슬픔을 느꼈다. 온전히 이해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너와 내가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제목은 타인을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슬픔을 이야기한 것이라 한다.


어떤 책들은 읽고 나서 사랑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이 책이 내게 그랬다.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런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희망이 된다.

그럴 때의 인간은 인간에서 사람이 된다. ‘동물의 일원이지만 다른 동물에서 볼 수 없는 고도의 지능을 소유하고 독특한 삶을 영위하는 고등동물’(인간)에서 ‘일정한 자격이나 품격을 갖춘 이’(사람)가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한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과의 만남은 예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을 한겨레21 지면에서 만나며 나는 이 글들이 책으로 묶여 나온다면 그 책을 사서 읽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어떤 글들은 문학 사용법에서 읽었던 글들이었으나 다시 읽으면서도 또 한번 감동하고 밑줄 그었던 문장에 다시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저자의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행복했고 여러 생각들을 했고 그런 생각과 만날 수 있게 해준 이 책에 감사했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이제는 그만하자, 그만할 때도 되었다, 심지어는 지겹다라고 표현하는 댓글을 보고 슬픔을 느낀 적이 있었다. 타인의 가늠조차 하기 힘든 고통 앞에서 어떻게 지겹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떤 참담함을 느꼈다. 그래서 이 책의 앞장에 나오는 ‘당신의 지겨운 슬픔’이라는 제목의 글에 공감했다.

이 책은 이미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이 책을 구매한 후 얼마 안 되어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슬픔에 대한 공부는 인간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하는 공부 같기에.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졸고, <책을 엮으며>,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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