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자아
민음사에서 격월로 나오는 문학잡지이다. 릿터 3 과월호를 구매해 읽었다. 매호 커버 스토리가 있는데 3호 커버 스토리는 ‘랜선-자아’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김금희’의 단편 소설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와 손보미 작가의 ‘리틀 걸 블루’가 인상적이었다. 유재영 작가의 Keep going도 재미있게 읽었다.
리틀 걸 블루를 읽으면서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와 곤 사토시 감독의 ‘퍼펙트 블루’가 떠올랐다. 유재영 작가의 Keep going을 읽을 때는 영화 ‘리플리’가 생각났다. 이 소설은 이혼한 남성 작가가 주인공이다. 그는 편집자인 전처가 맡은 책의 작가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우발적으로 그를 바다에 빠뜨린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후 그의 미발표 원고를 훔쳐 스타작가가 되지만 곧 표절 논란에 휘말리며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의 소설이 사실은 그가 직접 창작해 쓴 것이 아니라 특별히 고안한 전자 기계로 만들어낸 문장이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된다.
김금희 작가의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에는 모자를 쓰는 카페 여사장이 등장한다. 그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가 주인공인데 그녀는 우연히 이 여사장이 자기 또래의 남자 아르바이트생 경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해 묻는 여사장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까워진다. 그러나 이 남자의 삶에 로맨스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고 그에게는 그가 책임져야 하는 동거하는 여자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주인공은 알게 된다.
경수가 처한 현실은 사랑이 끼어들 틈이 없는, 생존하기에도 버거운 20대 청춘의 현실을 반영하고 대변하는 듯 보인다.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소설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냐고••••••경수가 어떻긴 뭐가 어떤가. 그냥 잘생기고 가난하고 우울하고 뭔가 일이 너무 안 풀리고 불안정하고 종종 죽고 싶고 그런데도 일은 나와야 하고 꿈은 멀고 다 귀찮고 때론 내 몸이라는 것 자체가 다 귀찮아서 버리고 싶고 길바닥에 버리고 줄줄 새어
나오게 심장이랑 머리랑 손톱이랑 발목이랑 다 벗어 두고 그냥 홀가분해지고 싶지. 그렇게 젊은 게 좋으면 니들이나 가져라, 하면서 그렇게 젊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버리고 눕고 싶지. 아무 데서나 누워서 구름이나 세고 싶지.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 김금희
경수에게 카페는 오늘을 내일로 이어가기 위한 노동이 있는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고용인인 사장과 피고용인인 경수의 로맨스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루 하루 생계의 어려움을 해결 하기에도 급급한 청년에게 사랑은 사치였을 것이다.
누군가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랑의 이야기를 읽게 된 여자의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상상 속 연애에 가까운 짝사랑을 지켜보며 현실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극작가 겸 연출가이자 소설가인 오카다 도시키와 시인 유진목의 대담도 인상 깊었고, 재미있게 읽었다.
가상의 세계에서 개인이 쓰고 있는 익명성의 가면과 그것을 벗었을 때의 모습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익명성 뒤의 자아와 현실의 내 모습 사이에서의 차이가 개인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랜선 자아로 명명되는 자아는 어떤과정을 거쳐 어떻게 획득되고 획득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릿터 3호 였던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