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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Oct 24. 2019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긴 시간, 비처럼 마음을 적시는 깊은 슬픔에 관하여

박준 시인의 시집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인데 베스트셀러인줄은 몰랐다. 책을 고를 때 베스트셀러 목록을 찾아보는 편은 아니다. 그냥 읽고 싶은 책, 마음이 가는 책을 고르는 편이라서. 끌림이 중요한 거 같다.


이 시집에 눈길이 가게 만든 것은 ‘능곡 빌라’라는 시였다.


몇 해 전 엄마를 잃은 일층 문방구집 사내아이들이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잠을 잔다 벌써 굵어진 종아리를 서로 포개놓고 깊은 잠을 잔다 한낮이면 뜨거운 빛이 내리/다가도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들면 덜컥 겁부터 먼저 나는, 떠나는 일보다 머무는 일이 어렵던 가을이/었다.

-<능곡 빌라>, 박 준


이 시는 연작시는 아니지만 이 문방구집 사내아이들의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는 시가 앞장에 등장한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실려 갈 때마다 형 지훈/이는 어머니, 어머니 하며 울고 동생 지호는 엄마, 엄마/하고 운다 그런데 그날은 형 지훈이가 엄마, 엄마 울었고/ 지호는 옆에서 형아, 형아 하고 울었다

-<연년생>,박 준


일층이 문방구, 이층이 박 준 시인이 사는 집이었나보다. 그날은 문방구집 아이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을 것이다.

이 시의 제목에서 장마가 의미하는 바는 ‘슬픔’이라는 것을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 ‘장마’(48쪽)에서 알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이 시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장마처럼 언제 그칠지 모를 슬픔에 관한 이야기들로 다가왔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아픔, 인생의 서글픔 같은 것들이 여름 장마처럼 축축하게 담겨 있는 시집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가뭄에 비는 반가운 존재이지만 길어지는 비는 누군가의 삶에는 슬플 수 있는 것. 길고도 짙은 장마처럼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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