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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Apr 21. 2020

아가미

그래도 살아달라는 편지

그래도, 당신 살아요


 남자가 어린아이를 안고 물에 뛰어든다. 자신의 어린 자식을 껴안고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남자는 죽고 아이는  노인과 강하라는 이름의 소년에 의해 살아남는다. 아가미가 생긴 채로.

동화 인어공주의 변형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야기는  소년이 만나 서로의 다름을 끌어안는 포용의 세계를 보여준다.

부모에게 버림 받았다는 점에서  소년은 같았고 소년 강하는 자신과 같은 어린나이에 세상에 던져진 소년을 연민한다. 그래서 기꺼이 그를 보호한다. 이질적이었지만  이질적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식과 함께 자살을 하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가끔 뉴스에 보도된다.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따라 죽은 비정한 아버지의 이야기도.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는 세상에 의해  사람이 소중한 생명을 잃는다.

 소설은  아이들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작가의 마음에서 출발한 소설처럼 느껴졌다.

물고기에게 아가미는 숨을 쉬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틈이 되어준 강하와 노인으로 인해 아이는   있었다. 그리고 물에 뛰어든 누군가를 구한다. 이대로 끝내서는  된다는 듯이. 다시 세상을 사랑할 기회를 가져보라는 듯이. 물거품이 되지 말고 살아 남으라는 듯이.


있는 그대로 곤을 존중했던 강하의 모습은 생명을 존중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은 그 사람을 한 생명으로 존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것을 다른 그대로 존중하며 함께 가려는 이 포용의 세계는 비정하지만 아름답다. 그리고 슬프다. 이것은 결국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185쪽, 아가미_구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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