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빵집에 갔다. 계산할 빵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빵집 주인이 웃으며 계산을 하면서 아이를 흘끔 보고는 말했다.
“좋을 때예요. 더 크면 안 따라다니려고 그래요. 조금만 더 커도.”
“네.”
아이와 함께 다니는 것을 귀찮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빵 봉지를 받았다. 어제 일이다. 대충 아이와 함께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인사로 받기는 했지만 오늘 아침 생각해보니 어쩐지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사람들은 아이와 어른이 함께 다니면 어른을 아이가 따라다닌다고 생각할까? 사실 그날 그 빵집에 들른 것도, 그날의 외출도 아이로 인한 것이었다. 사실은 내가 아이를 따라다닌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체로 아이 스스로 부모를 따라나서는 게 아니라면 어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부모가 아이를 따라다니는 형태가 더 많을 텐데.
왜 아이는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부모를 따라다니는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질까? 또 부모는 그런 아이를 조금은 귀찮아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걸까? 역시 아이들은 아직 어린 존재이기 때문일까?
분명한 건 아이는 나와의 외출을 좋아하지만 지금도 따라다니기 싫어할 때가 있고, 그럴 때는 나역시 억지로 데리고 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대체로 아이의 시간을 존중하려고 하고 아이에게도 내 시간을 존중 받기를 원한다.
어린이와 함께 다니는 어른들의 시간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시간만은 아닐 것이다. 어른 역시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하는 시간을 즐길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와 놀아준다는 표현이 그래서 가끔은 그 표현 자체로 놀이 자체를 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와 같이 놀이를 하면서 어른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고 어린시절로 돌아가 놀이를 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어린이가 언제까지 어린이일 수 없듯이 어린이와 함께 이것저것을 하는 시간도 찰나일 것이다. 다만 어린이에게 어린이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언제나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대체로 성장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부모가 되어 보니 하루 하루가 얼마나 빠르게 흐르는지.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얼마나 쑥쑥 크는지. 그 성장이 놀라울 정도다. 그 성장을 지켜보며 같이 기뻐하는 것 또한 부모의 일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할 것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매일이 소중하다. 언젠가 정말 같이 안 다니려고 할 때도 있겠지. 그만큼 아이가 성장한 것이기도 할 테니까 조금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기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