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자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고통과 슬픔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람의 마음에는 타인이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희망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실패했을 때 오는 어떤 무력감이 마음에 깊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 그것은 슬픈 비밀이다.
그런 무력감이 사람의 마음을 깊이 병들게 한다. 누구나 타인에게 이해 받고 싶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살아 오면서 생기는 모든 갈등과 고통은 이해 받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인이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타인이라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 보들레르가 말한 것처럼 타인은 때때로 지옥이 된다.
삶을 살아가려면 언제나 조금의 희망이 필요하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것. 그것이 사라진 사람은 삶을 지속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삶에서 오는 고통을 끝내는 것만이 오직 그의 목표가 된다.
먼 친척 중에 자살을 한 사람이 있다. 살면서 여러번 좌절을 겪었고 사랑에도 실패했고 몸도 아팠다고 한다. 지상파 방송에 나온 적도 있고 꽤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어서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가 있을 때 오르내리기도 했다.
죽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몸이 너무 아프다는 전화를. 사실 몸보다 그의 영혼이 더 아팠을 것이다. 그는 듣고 싶은 구원의 말을 듣지 못했고 결국 삶을 스스로 등지는 선택을 했다.
관련 뉴스 기사 댓글에 ‘듣보잡’이라는 말들이 눈에 띄었다. 타인은 지옥이다. 타인은 영원히 타인의 고통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삶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을 필요는 없다. 그건 누구나 누군가에게 한번은 찾아온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공평하고 또한 한없이 무력하다.
자살 기도를 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뛰어내리는 순간 강렬하게 다시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뇌리에 남았다. 사실은 제대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죽어버리면 기회를 얻지 못하는데 그것을 죽어가면서 깨닫는 일 또한 슬픈 일이다.
살아가면서 늘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삶에 양념처럼 버무려져 한데 뭉쳐져 있다. 여러 재료가 섞이고 시간이 흐르며 숙성되며 맛을 내는 김치처럼.
잘 익은 김치는 쉬어도 맛을 낸다. 삶을 제대로 숙성시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