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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Dec 08. 2016

말죽거리 잔혹사

폭력의 세계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열일곱...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나이. 그래서 상처를 받게 되고 세상에 길들여지면서 순수함에 때가 묻어 세탁이 불가능해지는 - 어른들의 세계로 편입하는 나이. 또는 그걸 강요 받는 나이. 순수한 만큼 더럽혀지기도 쉽고, 상처에도 민감한 나이.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가 바로 그 열일곱이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말죽거리 잔혹사는 폭력이 지배하는 남성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런 세계에 어머니라는 존재가 등장했다면? 아마 영화가 그려내고자 했던 [학원 액션 로망]은 사라져 버렸으리라. 나는 이 영화가 철저히 남성중심의 남성을 위한, 남성에게 바치는 남성 감독의 남성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가인의 등장을 빼놓고 간다면 좀 섭섭하긴 하다.
 
이 영화에도 예쁜 여고생이 등장한다. 어머니도 등장한다. (자기 아들이 맞았다고 학교에 와서 따지거나, 병원에서 고래 고래 악을 쓰는) 그러나 그들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하지만 한가인이 맡아 열연했던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예쁜 여고생 은주의 감성은 현수의 감성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수는 무척이나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남학생이었다. 라디오에 보낼 엽서에 그림을 그리고 꽃잎도 붙이는...이 영화를 만든 유 하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고백했듯이 현수는 과거 이소룡을 우상으로 섬기며, 짝사랑하던 여고생 때문에 몇날 며칠 가슴 앓이를 했던 감독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현수는 감독이기 이전에 시인이기도 했던  감독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캐릭터였던 것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이 영화 속에서 현수가 은주를 짝사랑하면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힘의 권력이 난무하던 그 시대의 - 마지막 남은 순수와 열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땅히 보호되었어야 할. 그러나 무참히 짓밟혀버리고 만....


남성다움을 강요 받고 힘의 폭력이 지배하는 남성의 세계에 길들여지면서 현수는 변하게 된다. 폭력의 세계에 편입하기로 한 순간, 그도 그렇게 혐오하고 증오했던 그들의 모습과 닮아가게 된다. 그러나 선도부라는 힘의 권력을 가진 녀석, 장관이신 아버지를 두고 있었던 그 힘의 권력으로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휘둘러대던 종훈이라는 녀석에게 - 현수가 쌍절곤을 휘두르며 한방 먹이던 모습은 무척 통쾌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던 그의 모습은 - 소수를 위해 얻어터지던 그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역시 자신의 힘을 이용해 사회적 소수에게 폭력을 휘둘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그래서 무척 씁쓸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현수보다 먼저 세상 밖으로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던 우식이가 했던 말은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너 싸움 잘하더라"라고 말하는 현수에게 "안 싸우고 이기는 게 진짜 이기는 거야"라고 말하던 우식이. 우식이는 맞지 않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안 싸우고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왜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 은주를 현수에게서 빼앗아갔을까.
 
그건 그 시대가 그걸 강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던 시대. 무력으로라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믿었던 시대. 힘을 강요하고 주먹을 쓰길 강요당했던 시대.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에 10대의 순수가 과연 지켜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현수의 고교 시절은 말죽거리 잔혹사로 기억되고 마는 것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힘 = 권력 = 지배 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힘의 세계/ 또는 폭력의 세계에서 그것을 감당하고 이겨내기엔 너무나 약했던 소녀 적 감성은 그래서 상처를 입고만다.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두손을 꼭 잡고 달리는 일과 기타를 배우고 연습하고 그것을 멋지게 연주하는 일, 그리고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것만이 전부였던 현수에게 원하는 것을 향해 돌진하고 피 터지게 싸워 얻어내는 일이 그렇게 쉬웠을리가 없는 것이다.
 
폭력을 답습하고 폭력에 길들여지고 끝내는 무릎 꿇고 마는 현수의 모습을 보는 건,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현수의 아버지가 아들의 선처를 부탁하면서 종훈의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처럼. 어쩌면 현수가 학교 밖에서 평화롭게 이소룡을 추억하면서 그때를 회상할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르겠다.
 
무릎 꿇긴 했으되, 그것에 비겁하게 달라붙지는 않았던 것이다. 힘의 권력 앞에 힘을 사용했고, 그래서 세상 밖으로 학교 밖으로 쫓겨났지만, 힘의 권력에 기생충처럼 달라붙는 비굴함은 끝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물론 현수의 아버지가 좀 비굴해 보이긴 했었다. 종훈의 어머니 앞에서.


그러나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세상 그 누구보다 강해 보였던 아버지가) 현수를 위해서는 무릎을 꿇을만큼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할 수 있다는) 다소 희망이 보이는, 두 사람이 앞으로 주먹을 부딪히는 대신 악수를 하게될 것이라는(어찌보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당연한 것이지만) 걸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럭저럭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좀 비굴해보이긴 했지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그래서 현수는 세상 밖으로, 학교 밖으로 쫓겨났지만 - 그건, 그의 끝은 아니었던 것이다. 끝이 아니었기 때문에 희망적일 수 있었고, 희망적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을 회상하며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어쨌든 - 그 시절을 힘겹게 지나온 현수가 그후로는 내내 행복했기를....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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