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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기범 Aug 08. 2016

신문 기사, 클래식이 되다(?)

권기자는 인사이트 터지는 가설을 제시했다! 시민들은 무시했다!(효과 0)

뜬금없지만 옛날 단어 풀이를 좀 해보겠습니다.

  

먼저, '영감'입니다.

옛날에는 정 3품과 종 2품의 관원을 일컫던 말이었는데요. 지금은 그냥 '노인'을 말하는 단어가 됐죠. 


이번에는 '양반'입니다.

조정의 문반과 무반을 뜻하는 말에서, 지체 높으신 분들을 부르는 표현으로, 그리고 지금은 그냥 '이 양반이~'로 시작되는 '욕설의 킥(?)'으로 쓰입니다.


언제 써도 질리지 않는 김 화백 짤. 싫어도 참아 이 양반아(…)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다른 분야 이야기를 해볼까요?


축음기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연주자 없이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일부 특권층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히 음반을 만드는 연주자나 가수도 소수였죠. 이런 현상은 20세기 내내 계속됐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내 이름으로 된 음반을 제작해 대량으로 생산하는 일은 정말 '능력과 재능이 있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디지털 음원 시장이라는 생소한 시장이 생겨났습니다. 컴퓨터를 통한 가상 악기, 다양한 작곡 프로그램도 등장했습니다. 복잡한 장비, 엄청난 자본이 없어도 누구나 '내 음반'이라는 걸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된 겁니다. (물론 퀄리티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돈을 위해 쓰레기 음원을 만드는 사람까지 나오는 걸 보면 '개나 소나'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써도 될 것만 같습니다. (제작자 여러분을 비방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 영원한 고오급 문화는 없다(?)


음원 시장뿐만이 아닙니다. '화백' 소리를 듣던 만화 시장은 어떤가요. 요즘은 누구나 '베스트 웹툰'에 도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졸업 사진 찍어드립니다' 팻말을 들고 졸업식장에서 사진 몇 장을 찍어주곤 몇 만 원씩 돈을 받던 '작가님'들도 거의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스마트폰 카메라와 자동 보정 앱, 그리고 셀카봉만 있으면 누구나 '졸업식 사진사'가 될 수 있죠.


저는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이론적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모든 사회문화적 권력은 사회가 질적, 양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해체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해체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접근성이 극대화된다는 말입니다. 대중이 문화의 소비자이자 제작자(프로슈머라고 하나요?)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장벽이 낮아진다는 것이죠. 


하지만 대학일기쯤 되는 작품이 나온다면? 고오급과 저질 콘텐츠의 차이가 무색해진다고(…)


#. 어쭙잖은 가설을 던져봅니다


이번에는 접근성이 극대화된 대중문화(또는 해체된 문화 권력)에 대한 나름의 가설을 던져볼까 합니다.


첫 번째는 접근성이 높아질수록, 전체 작품의 평균 완성도는 낮아진다는 가설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디테일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겨가면서 만든 걸작은 점점 줄어드는 동시에, 존재 가치가 0에 가까운 졸작의 수는 무수히 늘어난다는 겁니다. 소수의 걸작만 태어나던 시대에서, '극소수의 걸작=다수의 범작= 수많은 졸작'으로 시장이 재편된다는 말이죠.  


두 번째는 생산자가 그 작품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양극화한다는 가설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상(video)을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장면 한 장면에 혼을 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영상은 아무나 촬영할 수 있는 무언가의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한쪽은 상대방을 철학이 없다고 욕하고, 다른 한쪽은 너무 고매하다고 손가락질합니다.


미디어의 미래는 취침소등이야... 깜깜하지.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길!)


#. 미디어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제가 알기로, 21세기 들어서도 이런 현상을 강 건너 불구경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디어입니다. 신문, 방송할 것 없이 말이죠.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이들이 독점했던 생산 분야 - 보도, 출판, 영상 제작, 유통 - 에 대한 접근성이 급속도로 낮아졌습니다. 당연히, 스마트폰과 인터넷, SNS가 촉매가 됐죠.


이런 이유로, 기성 미디어들은 두 가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가설에 따르면 선택지는 2개입니다. 첫 번째, 오탈자 하나, 디테일한 팩트 하나까지 미친듯한 정교함으로 무장한 '클래식'이 될 것인가, 아니면 오탈자가 조금 있고 다소 틀린 내용이 있더라도 보고 들은 내용을 가감 없이 빠르게 쏟아내며 재미를 극대화하는 대량생산 방식을 택할 것인가.


어떤 게 맞는 방향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술 영화와 20분짜리 넷플릭스 드라마 중 뭐가 낫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한 번에 둘 다 할 수는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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