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대로 쓰는 21세기 窓 #2]
법원에는 매일 사건이 접수되고, 판사는 선고를 내린다. 판결의 결과는 판결문으로 정리된다. 이 판결문이라는 것은 어쩌면 기사보다 더 건조한 글이다. 사건에 담긴 피해자와 가해자, 그걸 지켜본 검사와 판사의 감정은 온 데 간데없고 '범죄 사실'과 '양형 이유'만 가득하다.
어쨌든 판결문이란 것은 우리 주변의 필부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세태를 반영하는 하나의 창문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나온 두 개의 판결문도 그랬다. 여성들의 '도시괴담'은 어쩌면 이런 데서 시작하는 건 아닐까.
첫 번째. 올해 스물세 살 된 여성 A의 이야기다. A는 2015년 12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B 씨를 만났다.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B와 A는 사귀게 됐다. 하지만 만남이 순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만난 지 5달 정도가 지났을 때 A는 전화로 B에게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 B의 거친 대답이 들려왔다.
“X 같은 년.” “XX 같은 년.” 섬뜩한 협박도 이어졌다. “네가 벗는 모습을 몰래 찍은 사진을 갖고 있는데 인터넷에 퍼뜨릴 거다.”
그 후 이별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A에 대한 B의 집착은 계속됐다. 그해 7월, 두 사람은 서울의 모처에서 만났다. 승용차 안에서 A는 B에게 또다시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주먹이 날아왔다. “나랑 헤어지려면 니가 맞아야 돼. 그래야 헤어질 수 있어.” 협박과 폭행 혐의로 기소된 B는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성 C와 그의 남자친구 D다. 지난해 6월 말 두 사람은 서울 송파구의 한 건물 1층에 있는 방에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이 옷을 벗고 잠자리를 하려는 찰나 창문 밖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D가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50대 남성이 있었다. 두 사람을 몰래 훔쳐보려다 들켰다. 만일 이 여성이 혼자 있었다면, 50대 남성이 있는 걸 알았어도 제지할 수 있었을까. 어쨌든 이 남성에게는 벌금 50만 원이 선고됐다.
판결문은 오히려 '약한' 수준이다. 요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적어도 자기만의 섬뜩한 경험담을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다 사라진다”, “창문을 열어 놓고 샤워하다 창문 바깥에 있던 ‘눈빛’과 마주쳤다”처럼.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뒤에서 발걸음이 들려 뛰어 도망쳤다”는 경험담은 식상할 정도다.
판결문에서 엿보기 어려운 섬뜩함은 현장에서 느껴진다. 지난달 서울 강남구의 한 빌라 주차장에서 이모 씨(35·여)가 전 남자친구 강모 씨(33)에게 폭행당해 숨진 사건이 그랬다. 현장에서 만난 목격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집안에 있었는데 어디선가 ‘퍽퍽’하는 소리와 ‘아아악’하는 비명 소리가 함께 들려왔어요. 살펴보니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게 보였고. 창문 너머로 누군가 거칠게 내뱉는 숨소리가 들렸죠. 잘 살펴보니 웬 여성이 축 늘어진 채로 엎드려 있었습니다….”
머리와 상체 인근에 피가 너무 많이 흘렀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씨가 벽돌 같은 둔기에 맞아 쓰러진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강 씨가 이 씨의 머리를 발로 밟아댄 것이었다. 이 씨는 두개골 골절 등으로 사경을 헤매다 결국 숨졌다. '어슬렁대며' 도망쳤던 강 씨는 경찰에 붙잡혀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데이트 폭력 집중 단속·수사로 8000여 명이 입건됐다고 한다. 신고되지 않는 각종 위협까지 친다면 여성들은 더 많은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위협에 저항하려는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지속적으로 여성 대상 범죄를 비판한다. 그러면 이내 이들에게 ‘전체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쏟아진다. 물론 이유 없이 특정 성별을 비난하고 비하한다면 문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트위터 같은 SNS를 중심으로 여성 대상 범죄를 비판하는 강경한 목소리가 계속 나오는 건, 그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만한 공간이 오프라인(off-line)에 없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두고 강경한 여성주의자들은 '그런 동정은 필요 없다'라고 외칠 테지만 어쩌겠는가. “어두운 길로 퇴근할 때마다 심장이 벌렁댄다”는 여성과 남성이 더 공감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창: 窓] 이란?
-1982년 동아일보 사회면에서 시작해 아직까지 게재되는 시리즈.
[멋대로 쓰는 21세기 窓] 이란?
-SNS와 동영상으로 정보의 양은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현장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차분히 글로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여전하다 생각, 그 시절 감성으로 2017년을 해설해 봅니다.
#이 기사의 원본은 동아닷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0214/82857676/1#csidx5697b473ba7fa8f82b5a393389f3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