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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기범 Apr 15. 2019

일제강점기부터 TMI였던 기자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판 '지식in' 다시 보기 (2)(1929년 9~10월

지난 포스팅에서 동아일보가 1929~1940년 운영했던 '응접실' 꼭지에 대한 관심이 은근히 높았습니다. 미묘하게 중독되는 맛이라고 해야 하나.. 비취재부서에서 잉여력이 폭발한 덕분에 '응접실' 꼭지를 더 뒤져보았습니다.


응접실은 1929년 9월 24일 등장하는데요, 추세를 보면 1929~1931년 한차례 활성화했다가 그 뒤로 몇 년간 노잼의 역사를 걸었고, 1936년 알 수 없는 이유로 분량이 폭발했는데, 왜인지는 찾는 대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이번에는 1929년 9월과 10월입니다. 시대적으로는 신간회의 영향력이 가장 컸을 시기이고, 일제는 '조선박람회'라는 것을 통해 자신들을 '좋은 정부'라고 어필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내재한 갈등과 억압이 점차 곪아가던 때가 아니었나 합니다.



내가

일제 강점기의

TMI다!


첫 등장부터 TMI의 기질이 다분한 모습.

기자: 첫인사. 기자와 독자의 친분을 두텁게 하려고 응접실을 개방합니다. 면회시간의 제한도 없으니 1년 365일 5시 48분 46초 동안이면 언제든지 오십시오. 무슨 이야기든지 주고받기로 합시다.


종이 공간에 한 글자 한 글자 담기가 아까워 사진도 넣지 못했던 시대. 1년 365일 5시 48분 46초를 다 적는 TMI가 돋보이는 인사말입니다.

아 365일이면 365일이지 5시간 48분 46초는 뭐냐고요? 그것은 바로 '1 태양년'인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정확히 적은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썼다가는 데스크한테 불려 갔을 듯.. 응 기범아 회사로 좀 들어올래?) 정확히 아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전형적인 TMI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왜 일제 강점기 지면을 뒤지다가 1 태양력의 길이를 알게 되었는가.. 옛 선배시여.. 오오) TMI (오오


TMI 뿐만 아닙니다. 자뭇 퀄리티 관리에도 충실한 모습. 문을 연지 이틀 뒤의 응접실입니다.

독자: '응접실' 이란 이름부터 다정한 맛이 납니다. 재미도 있고요. 그런데 어떤 말을 물어야 좋을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려!
기자: 무슨 말이든지 따지지 않습니다(都不關). 그러나 묻는 말도 재미있고 간결해야 하며, 따라서 대답할 말도 간결하게 될 수 있는 것을 물어봐 주십시오. 그리고 기자의 설문에 많이 응대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틀 뒤 3월 28일 노잼 DNA가 폭발하는데,

독자: 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것이 무엇입니까?(평양 사는 한 독자)
기자: 글쎄요.. "제비 같이 빠르다"는 말이 있으니, 예전 사람들은 제비가 제일 빠른 줄로 알았던 거죠? 제비야 1초 동안에 43간 밖에 못나는 것이니, 1초 동안 지구를 일곱 번이나 도는 광선에 비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광선보다 더 빠른 것이 있답니다. 놀라지는 마십시오. 1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 번은 고사하고 700번, 아니 7만 번도 더 도는 것이 있지요. 사람의 '생각'이 그렇답니다.


뭐야... 노잼이야...

(실패한 드립이 박제된 기분)


아 여기서 잠깐, 43간이 얼마냐고요? 1간이 1.8m이니 43간은 78m 정도 되겠네요. 예나 지금이나 디테일에 집착하는 기자들이란..(자료 찾다 악몽 꿀 것 같다)

더럽게 재미없어. 동아일보 기자님이 옛날 기사 보고 와서 말해주는 거 듣는 기분이야..


죽 훑어보면, 재미있는 것은 응접실 초기에는 '최고' '가장' '1등'을 묻는 질문이 유독 많았다는 겁니다. '1등 기생은 누구냐' '가장 똑똑한 사람이 누구냐' 같은 식. 예나 지금이나 '1등' 집착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은데요.


기자들은 "만원 들고 직접 가서 '제일 기생 불러주세요' 해보세요"라든가, "이 세상은 똑똑지 못하고 못 사는 세상이니, 지금 살아가는 사람이 모두 똑똑한 것이죠"라는 식으로 눈치껏 피해 가기도 하고 농담으로 받아치기도 합니다.



시대의 고민은

행간에 녹이고


다음은, 10월 10일 내용입니다.

독자: 신문을 일일이 읽고 나면 공연한 번민이 생기니 도대체 무슨 까닭?(고원 S생)
기자: 지금 '현실'이 지금 '사람'으로 하여금 번민을 가지도록 되어 있는 까닭.


(반말에는 반말로 대답한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응접실에도 이런 '시대에 대한 고민' 코드가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10월 20일 응접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 박람회 안에 들어가니 '조선인 음식점 구역'이라고 하고서는 또 '변소'라고 손가락을 그려 붙였으니, 그런 괘씸한 버릇이 어디 있겠죠?(아현동 최 씨)
기자: 애초에 보지들 말았으면...


아현동 사시는 최 씨 어르신(?)은 한 박람회에 '조선인 음식점' 구역에 '화장실' 표시를 함께 해두었다는 것을 두고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며 분개하셨습니다. '조선 음식'을 '화장실'에 갖다 붙여 함께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라는 것이겠죠.

물론 단순히 방향 표시를 한 것에 불과하겠지만, 당시 '조선인'과 '조선문화'에 대한 차별로 인한 민중들의 심리적 저항감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최 씨 어르신이 분개한 이유는 박람회 자체의 성격 때문이기도 한데요. 여기 등장하는 박람회란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복궁 일대에서 열린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를 말합니다.

조선박람회는 1915년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의 확장판 정도라고 할 수 있다는데요. 경복궁 일대에서 열린 조선박람회는 조선인(?)들에게는 '일제의 산업화(라고 쓰고 식민지화라고 읽는다) 성과 자랑질 대회'라는 인식이 강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화려하게 치장된 경복궁의 사진이 남아있는데, 저만 그런가요? 왠지 모를 모멸감..


이런 감정 때문이었을까요? 기자도 "애초에 (박람회를) 보지들 말았으면.."이라며 말을 흐리고 말죠.


....야 이거 경복궁에 내다 붙인 놈 일로 나와봐



90년 전 선배는

‘기자란 무엇인가’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0월 24일의 응접실 소개하며 이번 편을 접어볼까 합니다.

독자: 신문기자, 000한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원산의 R)
기자: '사회'를 '사회'에 알려주는 사람. 우선은 노형(老兄)의 질문을 이렇게 대답해주는 사람.


신문이 거의 유일한 소통 창구였던 20세기를 넘어 2019년에는 '사회'를 '사회'에 알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저도 이렇게 글을 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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