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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기범 Oct 19. 2015

'이성혐오'라는 떡밥

이성혐오는 정말 '헬조선'의 유물인가


여자들은 ‘잘못 태어난 남성’입니다.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당장 저에게 항의 댓글을 달려고 마음 먹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저를 비난하지는 말아주세요. 


사실 저 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고 알려진 말을 조금 바꾼 거니까요. (저 입장은 중세 교회에서도 반복됐습니다)


이분입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두상


이 뿐만이 아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노예는 심사숙고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부족하다. 여성은 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권한(authority)이 부족하다. 아이도 가지고 있지만, 불완전하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제가 한 말 아닙니다(긴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풀리지 않으셨나요? 송구스럽지만, 그렇다면 제가 훌륭한 ‘떡밥(인터넷에서 누리꾼을 도발하기 위해 던지는 낚시성 소재를 뜻하는 말)’을 던진 셈이 되겠네요. 



사실 ‘이성 혐오’를 조장하는 떡밥은 아주 강력합니다. 


누리꾼을 ‘발끈’ 하게 만들기에 이만한 소재가 없죠.

예를 들어 볼까요. 7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네이버 베스트 도전 웹툰 코너에 올라온 한 웹툰이 난데없이 ‘여성 비하’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웹툰 내용은 라섹 수술을 했다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글 중간에 여성 혐오 용어로 오해받을 수 있는 ‘아몰랑(아, 몰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글의 전체적인 맥락은 여성 혐오 현상과는 관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웹툰 작가는 누리꾼들로부터 ‘여성 혐오자’라는 질타를 받았습니다. 결국 해당 웹툰의 작가는 해명이 담긴 사과문을 올려야 했습니다.





비슷한 일은 많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회원 이름도 직업도… 아몰랑 동호회’라는 제목의 카드 뉴스를 하나 올렸습니다. 8월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취미 생활을 공유하고는 싶지만 신상 노출이나 적극적인 교류는 꺼리는 무(無)교류 동호회가 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게시물에 딱 하나 댓글이 달렸는데, 제목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몰랑'의 유래가 됐다는 캡처.



여성 혐오 현상에 발끈한 일부 누리꾼은 더욱 강력한 떡밥을 던집니다. ‘남성 혐오’에 대한 글을 올리는 페이스북 페이지나 웹사이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각종 성범죄 기사나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 게시물을 퍼 나르면서 남성들을 비판합니다.

이들은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등에 올라온 여성 혐오 게시물 내용을 그대로 본뜹니다. ‘여성’을 ‘남성’으로만 바꿔 남성 혐오 게시물로 재탄생(?) 시킵니다. ‘가슴이 작은 여자는 매력이 없다’는 내용을 ‘성기가 작은 남성은 매력이 없다’라고 바꾸는 식입니다. 이른바 ‘미러링(Mirroring)’ 활동입니다.




이들은 이런 활동을 ‘남성 혐오’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희 회사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이성 혐오 현상을 다룬 게시물을 올렸더니, 여기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성 혐오 현상은 사실 ‘여혐혐’ 현상이라고 해야 옳다.


헷갈리시나요? 저도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발음도 어려운 이 말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줄인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 일본의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도쿄대 명예교수)의 책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따온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 책입니다.


이 말을 조금 복잡하게 설명한다면 이렇습니다. ‘남성 혐오’ 현상은 드러내 놓고 여성을 비하하는 일부 남성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의미라는 겁니다. 


즉 맹목적으로 특정 성별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때문에 '남성을 혐오한다'라는 표현이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성을 혐오'하는 일부 남성을 '혐오'한다는 말이죠. (여전히 어렵..)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이성 혐오 현상. 과연 우리 사회의 분열을 보여주는 부정적인 현상에 불과한 걸까요? 


저는 오히려 양성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한 과정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양성 평등에 대한 고민은 지금까지 수면하에 숨겨져 왔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이 익명성과 참여라는 SNS의 특성과 맞물려 폭발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래서 서구 사회는 어땠는지 살펴봤습니다. 


알고 보니 이성 혐오의 역사는 꽤 길었습니다. 옥스퍼드사전 인터넷판을 보니, 여성 혐오를 뜻하는 영어 단어 미소지니(Misogyny)는 17세기 중반에, 남성 혐오를 뜻하는 미산드리(Misandry)는 19세기 후반에 각각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여성 : 비밀이 없는 스핑크스 (비밀 없는 스핑크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소설 제목)


즉 우리나라의 이성 혐오 현상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우리나라만의 유별난 현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과격한 표현들, 때로는 범죄에 가까울 정도로 극단적인 글이 많습니다. 저 또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하지만 이런 글들은 대부분 ‘떡밥’이거나 개인의 일방적인  '배설물'일뿐이죠. 



그 안에 숨어 있는 우리의 욕망을 읽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이성을 보다 잘 이해하고, 잘 어우러져 살고 싶은 욕구 말입니다극단적 주장은 잘 걸러 내고, 그릇된 성 관념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는 내용을 잘 골라 '섭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숙한 누리꾼이라면 말이죠.



# 이 글은 8월 지면에 실렸던 기명 칼럼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덧.

- 당시 메갈리안에 기사가 링크됐었습니다. 사진에 달았던 '손가락이 성기를 상징한다'는 글귀에 민감하게 반응하셨습니다. '이퀄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이었는데요. 


제가 팔로 업한 것이 맞다면 저 손가락에 처음 부여됐던 의미는 '성기 비하'가 맞습니다. 만약 제작자가 처음부터 '평등'의 의미를 부여했던 거라면, 제 잘못이 맞겠네요(ㅠㅠ) 인터넷의 세계는 참 깊고 오묘하고 사실관계 파악이 어렵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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