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판 개드립 열전 5] 독자들의 뻘소리에 대응하는 기자들의 센스
"제가 1년 전까지
생활고가 막심했거든요?
근데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돈을 모으고
싶거든 이름을
<석마(石馬)>로 고치라'고
일러주더라고요?
그래서 그대로 개명하고
광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에 성공했습니다.
이래도 꿈이
못 믿을 것이라고 할 겁니까?"
_1936년 5월 19일 동아일보 '응접실' 중
일제강점기는 역시 20세기라, 아무래도 요즘 관점에서 보면 뜨악할 만한 미신과 편견이 등장합니다. 이날 응접실에 질문을 던진 독자는 아무래도 꿈을 믿으시는 분이었나 봅니다. 당시 흥했던 광업에 도전해 성공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성공이 개명에서 시작됐다 굳게 믿으시는 모양. 아니면 그냥 자랑질
만약 제가 이 우편을 접했더라면, 아 뭐래는 거야, 한 마디 하고는 접어치웠겠지만요. 우리의 <망중한>님(응접실 코너 속 기자의 ID)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허풍에는 허풍으로 맞서겠다는 것이었을까요? 답변은 이랬습니다.
기자: 저도 꿈에 그 노인을 만났었는데, 당신한테 그런 말 한 일이 없다고 합디다? 원..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 없군요.
독자의 황당한 질문에도 당당하게 받아치는 유쾌함. 당시 <응접실> 만의 매력입니다.
응접실은 <망중한> <응접자> 씨가 등장하는 만큼, 이들의 신상을 궁금해하는 등 쓸데 없는 우편도 많았었나 본데요. 이래서 응접실은 '사사로운 질문'이나 '개인적 질문' 등에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건 그냥 내보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독자: <망중한>의 애연 애주의 정도는 어떠한지?
기자: 사사로운 질문의 범위에 속합니다마는, 실명으로 공언해달라는 원칙을 너무도 거절했으니 이거라도 답변해보죠. 술은 worst of worst(下之下), 담배는 평범한 사람 중에서는 많이 피는 편?(中之上)
독자: 귀보의 4월 30일자 임시 조간 4면에 보니 "아디아우 고국산천"이란 기사가 게재되었던데, 아디아우란 무슨 말입니까?
응접실에는 이처럼 외래어 또는 외국어에 대한 질문이 곧잘 등장합니다. 아무래도 당시에는 생소한 표현들이 많았겠죠? 기자들은 '트렌디'한 용어를 쓰고 싶어 했겠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아디아우'가 뭔지 저도 순간 ??? 했습니다. 어디 지명인가? 싶었는데,
기자: 이별할 때 쓰는 "잘 있거라"의 의미를 가진 외국어입니다. 일종의 유행어로 일반이 흔히 쓰는 것입니다.
아.... A, Di, E, U ... 아듀였군요. 당시에도 유행어로 썼다고 하니 신기합니다. 그래도 뭔가 잘난척하는 것 같기는 하네요.
당시 독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이틀 뒤에는 이런 질답도 보입니다. 기자가 구구절절 답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무래도 당시 외국어나 외래어 사용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아니었나 짐작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독자: 신문 잡지에 흔히 영어 등 외래어를 남용하니 이것은 우리글을 등한시하고 외어를 모르는 독자를 멸시함이 아닐까요? '박래의 못(큰 배의 못, 별거 아닌 것)'인 건지 남의 글을 좋아하던 여벽인건지,, 응접자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기자: 남용하는 폐들이 많은 것으로 봅니다. 동서 문물의 교류가 옛날과 다른 오늘에 있어서는 외래어의 사용은 부득이한 당연입니다. 그렇습니다마는 필요 없는 남용은 배격할 일입니다. 남용하게 되는 이유를 따지고 따지면 구경, 귀견과 같이 일종의 사대주의의 옛날 나쁜 습관이 남은 흔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마는 보통 신문지상에 늘 나오는 외래어쯤은 시대의 상식으로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독자: 요즘에 가짜 여학생과 소위 단발낭 아가씨들이 골목으로 행각(여기저기 돌아다니다)하시면서 순진한 청년에게 고통을 주는데, 그 대책은 없습니까? (5월 21일)
여기서 <단발낭>이란, 단발머리 여성을 말하는데요. 당시에는 여성이 단발로 머리를 자른다는 것만으로 충격이었다고 생각한 모양. 당시를 조명한 이런 기사도 있습니다.
단발머리 여성이 지나가면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그 해괴함에 놀래지 아니하는 이가 업섯더라”는 기사가 지면을 장식했다.
여성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귀를 내어놓는다는 행위 자체가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해괴함'과 '야함'을 의미했고, 동시에 지식인에게서는 '깔끔하고 위생적이다'는 양면적인 평을 들었다니 좀 놀라운데요. 이쯤에서 우리의 <망중한> 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궁금해지게 됩니다. 답은 이랬습니다.
기자: 거리의 여자에게서 고통을 느낀다니 벌써 순진은 아니외다. 옛날 아난학자(싯다르타의 10 제자 중 한 명인 아난다를 뜻함)는 창녀와 같이 동침하고도 마음이 움직이질 않았다는데, 그 같이 마음이 오징어 뼉다귀 같이 연약하고서야 어찌하겠습니까? 노형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맡은 바 업무에나 정진하십시오.
이 발언이 당시에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개인적으로 퍽 궁금해집니다. "길에서 여성들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니 잘못이지 여성들 잘못은 아니지 않냐?"는 취지인데요. 1930년대임을 생각한다면 뭇 남성들이 '무슨 소리냐'고 화를 내지 않았을까요? 당시 '신여성'과 관련한 논란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앞으로 발견하는 대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같은 날 다른 독자는 이런 시비를 붙였는데요. 가지가지한다
독자: 음식점 광고를 보니 <떡국> <국밥> 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떡국이라 했으면 밥국이라고 하거나, 국밥이라 하였으면 국떡이라 하지 않고, 이리저리 바꾸어 썼습니까?
떡국의 역사가 오래된 것 같은데, 사실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대략 살펴보니, 아무래도 조선 후기에나 대중들에게 익숙해진 음식이 된 것 같은데요. (귀한 쌀을 불려 먹지 못할망정 줄여 먹는다니 말이 안 되지 않나요?) 그래서인지 이 독자의 질문에서도 진심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기자는 어떻게 답했을까요?
기자: 떡국은 떡이 몸통이요. 국은 용이라, 떡으로 된 국이란 뜻으로 떡국, 국밥은 원래 국이 주요, 밥은 손님이라, 국에다 섞은 밥이란 뜻으로 국밥. 절대로 국떡이 아니오 밥국이 아닙니다.
한줄평: 뭐야 왜 이렇게 진지해
독자: 애정 없는 부부생활을 그대로 의리와 도덕 밑에서 일생을 불행과 고통으로 지내야 될까요? 부인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함이 물론 좋지 못한 일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단념하고는 일생을 그르칠 듯합니다. 여기 대해서 눈물 있는 단안을 내려주십시오.
기자: 이 같은 비극이 조선천지에 허다할 것을 상상하니 차라리 듣지나 말고자 합니다. 이 같은 비극에 끝없이 동정은 합니다마는 단안할 지혜와 인자함과 용기가 없습니다.
한줄평: 여기가 일제강점기 버전 네이트 판인가요? 마지막으로 오늘 마음에 와 닿은 욕 한마디 하려고 합니다. 야이 오징어 뼉다귀 같은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