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낙수집> 다시보기 1] 신문도 종합플랫폼이었어
때는 1932년 11월 21일. 서울시 본정서(本町署, 지금의 서울 중부+남대문경찰서) 형사대에 기괴한 소문이 들려 왔다. 내용은 이랬다.
상하이 폭탄범(당시 기준으로 이렇게 불렀다) 윤봉길의 아우 윤봉이(尹奉伊)라는 스무살 청년이 장총 실탄 800여 발을 휴대하고 배회하고 있어 체포했다.
윤봉길이 누구인가. 같은 해 4월 중국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제의 상하이파견군 총사령관과 일본거류민단장을 죽이고, 총영사와 제3함대 사령관, 제9사단장 등에 중상을 입힌 '폭탄범(일제의 시선)'아니던가. 저 소문이 들려오던 시점에서 하루 앞선 20일 윤봉길이 일본 오사카의 군 형무소에 수감된 상황. 저 보고가 사실이라면 윤봉길의 동생이 윤봉길의 뜻을 이어 국내에서 '거사'를 꿈꾸었다는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난리가 났다. 순사들도 그랬겠지만 기자들도 마찬가지. 엄청난 긴장 상태에서 출입기자들이 차를 몰고 경찰서로 몰려갔다. (동아일보 사옥에서 중부경찰서는 지금 기준으로 차를 탄다면 10분이면 달려갈 수 있다.)
현장에 몰려간 기자들이 알아 보니, 실제로 윤봉이라는 청년이 실탄을 들고 배회 중인 것은 맞았다. 형사대가 21일 오후 10시경 태평통(지금의 세종대로, 숭례문 앞 신한은행 인근 태평로 거리)에서 웬 룸펜 한 명을 붙잡아 몸을 수색했는데 이 사람에게서 장총 탄환이 나온 것. 물론 새 잡는데 쓰는 녹두알 같은 탄환이었지만 어쨌든 총알은 총알이었다. 중부서로 윤봉이를 데려온 순사들이 이 인물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그 탄환은 남대문동의 조선화약회사(한화니..?)에서 지난 20일 밤에 훔친 것이었다는 것.
문제는 윤봉이가 윤봉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윤봉길 의사의 동생들의 이름은 마지막에 '의'자 돌림을 쓰기 때문에 인연이 없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이름이 비슷한데 혹시 윤봉길의 친동생이 아니냐"는 억측이 나왔고, 이 소문이 발에 발을 따라 퍼졌고, 소문을 들은 기자들이 혼비백산해서 달려오게 만든 것이다.
제목 낚시(기자들이 낚인 기사로 낚시질을 하는 나란 기자)가 됐다면 죄송합니다만, 이 해프닝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1932년 11월 23일 동아일보 2면 <낙수집>이라는 코너에 이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물론 해당 기사에서는 <윤봉길>을 <윤봉창>이라고 잘못 썼지만(두 분이 같은 해에 의거를 하셔서 혼동이 있었던 모양) 말이죠.
이 기사는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 별 것인' 그런 기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면 당시 국내 분위기를 너무 잘 보여주는 기사이기 때문인데요. 사건 자체는 '윤봉길과 비슷한 이름의 룸펜이 동생으로 오해받는 해프닝이 있었다'는 내용이니 별 것 아닙니다. 그런데 가만히 곱씹어 보면 당시 총독부의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윤봉길의 수감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비슷한 의거 시도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순사들의 머리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중부서로 달려갔던 기자의 마음은 이랬을 겁니다. '아 뭐야 늦은 밤에 가짜 소식에 속아서 허탕 쳤네.' 그렇지만 그 허탕이 짧은 가십성 기사로 남아 80년이 지난 지금 저희에게 당시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짧게 연재됐던 코너 <낙수집>의 성과입니다.
제가 살펴보니 <낙수집>은 정색하고 기사로 쓰기에는 좀 부족한데, 당시 세태와 분위기를 잘 보여주거나 허탈하고 우스운 이야기를 다루는 그런 코너입니다. <낙수집>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어떤 일의 뒷이야기를 이르는 '낙수(落穗)'라는 단어에서 착안한 이름인 것 같네요. 동아일보 지면을 빛냈던 '휴지통'과 비슷한 맥락의 꼭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록하는 모든 일이 꼭 진지할 필요는 없다'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2000년대 이후 신문은 그야말로 진지하기만 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물론 당시 커지는 수준 낮은 일부 인터넷 언론이나 가십성 커뮤니티와 차별화하려는 시도였다는 데 의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의 이런 변화는 아무래도 독자 친화적이지 않습니다.
'진지'와 '전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태를 다양하고 재치있게 보여줄 수 있었던 가벼운 코너들이 하나둘 씩 사라지거나 약화하는 역효과를 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신문을 보던 1990년대에 비하면 지금 신문은 진지하기 그지 없습니다. 연재 만화도, 통속적인 소설도, '이건 뭐야' 싶은 사건사고 관련 기사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지루하고 어려운 이야기만 가득한 잡지를 보지는 못할 겁니다. 중간중간 양념처럼 들어간 가벼운 코너들은 독자들의 읽고자 하는 욕구를 리프레시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때론 떠나려는 독자를 붙잡아 주기도 하고요. 정말 어려운 전문지라도 하나둘 씩은 '만평'이나 '네컷 만화' '수필' 등을 포함하고 있잖아요.
'흥미를 끄는 것'으로 유도해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는 요즘 뉴미디어 업체들의 콘텐츠 전략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를 가장 효율적이고 점잖게 수행했던 곳은 바로 19~20세기 나온 신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 시들어가는 언론들은 '보도 전문지'가 아니라 '종합 콘텐츠 플랫폼'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신문사가 몇십년을 해왔던 일이고, 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챠로, <응접실> 시리즈에 이어 <낙수집> 시리즈(...)도 이어가보려 합니다. 부디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발견되길. 여러분들도 부디 응원해주십시오. 제보(?)도 언제든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