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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기범 Aug 01. 2019

"우리 손으로 못하는 일이니..."

[일제시대판 개드립 열전 6] 그 때 신문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에 대하여

1936년 5월 27일, 한 독자의 이런 질문이 <응접실>에 실렸습니다.


독자: 금반 시내의 무슨 동(洞) 하든 것을 '정(町)'으로 전부 고쳤으니, 무슨 불가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었을까요?


아실 분은 아시겠지만, 이보다 앞선 3월 조선총독부는 경기도 고시 제 32호를 통해 경성부의 행정구역 명칭이 '동'에서 '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아현정, 신길정, 청량리정 등등.. 정(町)은 아시다시피 일본의 행정구역 명칭. 조선시대부터 써오던 '동'이 없어지는 것이니 사람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겠죠. <응접실>의 운영자 <망중한> 씨의 마음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자: 부(경성부) 내의 구역 이름을 통일한다는 주견(주관적인 의견)인 듯한데, 주견과 방법이 우리와는 딴판입니다. 그러나 하는 수 있나요? 우리 손으로 못하는 일이니...


우리. 우리라는 두 글자가 제 눈에 들어옵니다. 신문에서 '우리'라는 표현이 나타내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통상 독자 전체를 일컬을 때일겁니다. 여기에서 '우리와는 딴판' '우리 손으로 못한다'고 했으니 이는 '총독부가 아닌 사람들' 혹은 '조선 사람'을 말합니다. 기자는 부지불식간에 '이 신문을 보는 독자는 총독부 또는 일본제국 인사들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듯 합니다.


사실 당시는 검열이 워낙 심하던 때라, 우리를 우리라고 칭하는 이런 단어 선택은 어쩌면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기사를 보면 윤봉길 의사를 '상하이 폭탄범' '불경범' 등으로 표현한 기사들이 발견되거든요. 물론 당시 기준으로는 '객관적'인 표현입니다만 썩 유쾌한 표현은 아니죠.


응접실 운영자가 '우리'라는 표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썼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시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적어도 기자들이 동아일보를 민족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또렷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독자의 질문에 쓰인 '금반(今般)'이라는 단어 자체가 순화해야 할 일본식 한자어 표현(こんぱん)이었습니다. 일본식 주소체계 변경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일본식 한자어를 사용하는 모습이 뭔가 씁쓸하네요.)


그냥 갑자기 이 사진이 쓰고 싶었습니다. #총독부철거


<응접실>에서

행간을 읽다


이런식의 애매한 답변들은 때때로 보이는데요. 대체로 당시 상황을 속시원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태도로 읽힙니다. 나름의 행간의 힘을 빌어 안타까움 혹은 답답함을 표현한 듯 합니다.


5월 31일에는 이런 문답도 있습니다.


독자: 현실사회가 실증이 납니다. 종식될 날은 언제이며 장래 다가올 사회는 무슨 사회일까요?
기자: 구체적으로 대답하기 거북합니다마는 "만물은 유전한다"고 하니 현상태 대로 있는 법은 없습니다. 원시공산사회로부터 지금까지 굴러온 자취를 살펴보면 짐작될 것입니다. 이쯤 합시다.


<망중한> 씨가 '이쯤하자'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인이 당시 공산주의 사상에 관심이 많아서? 아니면 조선의 독립 이야기로 이어질까봐서일까요? 그런가 하면 6월 3일에는 이런 문답도 있는데요.


독자: 현재 상황 아래 조선인의 급선무는 무엇무엇입니까?
기자: 발행할 수 있는 범위에서 또는 현재의 실정 아래서 가능한 범위에서 말하라면 첫째는 교육, 둘째는 교육, 셋째는 교육, 넷째는 교육....


음, 계몽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데 계몽주의적이네요. 물론 신문에 대고 '항일 투쟁'이니 '의거'를 언급할 수도 없었겠고, 당시 신문 기자나 되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했을 리도 없을 것 같으니 '교육'이 최선의 답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만약에 '발행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서 말하라고 했으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요? 독립?


뭐 당시 트렌드(?)가 계몽운동이기는 했습니다.


"제가 별똥별을 먹었는데요"

1936년 5~6월의 응접실 pick


독자: 축지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기자: 축지법이요?? 보행으로 한 달 걸리는데를 기차로 하루에 가니 이거 축지가 아니오? 기차보다 비행기는 또 축공이고, 전신 전화도 끔찍한 축지거니와 당대의 총아 라디오나 벌써 실험제인 텔레비죤에 이르러서야 축지고 축공이고 도무지 거리라는게 없어지고 말았소이다. 기록도 분명치 못한 케케묵은 축지법은 알어서 무엇하시겠소?


한줄평: '실험용 제품'인 텔레비전..이라니, 세월이 느껴집니다.


독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나라가 일파가 되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 화(화란? 어느 나라일까요?) 등 나라가 일파가 되어 싸워서 인류사회의 제도를 변천해봄이 어떠한지요. 응접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기자: 응접자는 별 생각 없소. 전쟁이 난다면 구경이나 하겠소. 구경하다가 힘이 미치면 한몫 끼어 볼까도 하오마는.


한줄평: 그 전쟁에 우리가 무슨 피해를 입을지는 생각 안해봤나요...


독자: 산비탈이나 모래밭 같은데 가보면 흡사 쥐똥같은 것이 있는데 속칭 '별똥별'이라고 합니다. 입에 넣어 씹으면 딴딴하고도 찐득찐득합니다. 정말 별똥을 누는지요?
기자: 당신이 말한 바로는 그 '별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마는, 속칭 별똥이라는 것은 손석이라는 일종의 광물질입니다. 전체의 파편으로 생각하는데 그렇게 흔하지는 않습니다.


한줄평: 엄마 쟤 또 똥먹어!!!


독자: "칭칭도 나네" "강강도수얼네"란 무슨 뜻입니까?
기자: 경북에서 흔히 하는 속요 중의 일절이지요? 뜻은 모르겠습니다. 있을 듯 싶은데 누가 아시거든 알리십시오.



한줄평: 아니 1900년대 형들도 모르면 어떡해


응 그 똥 아니야.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t-fsbY_HQ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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