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높아진 미디어 리터러시에 맞추려면
끝에 단어 세 개만 좀 바꿉시다.
'볼 수 있다'가 아니라
'매우 보인다'로.
_이강희 조국일보 논설주간(백윤식 扮)
영화 <내부자들>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이것 만큼 <미디어 리터러시>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미디어 리터러시>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건 2015년쯤이었다. 설명이 너무 장황해 이해하는데 한참 걸렸지만, 간단하게 요약하라면 '미디어에 대한 독해력' 또는 '미디어 활용 능력' 정도다. 리터러시라고 하면 '문해력'이라고 해석하지만,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아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독해력' 정도로 설명하는 게 편하다.
그래도 어렵다면 1970~1980년대생에게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이라는 책 알아? 그게 미디어 리터러시를 다룬 책이야." 물론 객관적이지는 않은 책이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 이렇게 말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미디어에 접근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위키피디아 영문)'을 말한다.
이런 능력에 가장 민감한 집단은 누구일까? 정치인, 법조인도 있겠지만 기자도 그중 한 축이다. 수습기자 시절에 취재원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말고 '꼼꼼하게' 받아 적고 정리하라는 지시를 끊임없이 받고 비슷한 훈련을 계속해서 하는 이유다. 취재원의 뉘앙스와 애매한 표현을 제대로 읽어내라는 뜻이다. (물론 매번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면 이런 표현도 있다. "그렇게 쓰시면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릴까. 좀 풀어서 말하자면 "니가 말한 게 틀린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맞다고 내가 확인해준 건 아니야"라는 뜻 아닐까. 좀 더 관심법을 발휘하자면 "쓰겠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안 된다고 말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나를 인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혹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 정도 일거야. 물론 그 기사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면 책임은 너의 것이지" 정도 아닐까?
그런데 이런 모호한 표현이나 어려운 표현을 기자들이 그대로 기사에 활용하는 것은 매우 불친절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리드 문장을 "경찰이 00 대기업에 대한 압수수색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총수 A 씨에 배임 혐의를 적용할 수도 있지만 안 할 수도 있다"라고 쓸 수는 없지 않은가! 혹은 코멘트를 도와주신 교수님이 한 문장을 약 5분에 걸쳐 말했다고 해보자. 5분 분량의 코멘트를 모두 옮기는 건 불가능하고 불친절하고, 데스크한테 혼난다.
결국 기자는 취재원의 핵심만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을 고민하게 된다. 최대한 그의 본심과 의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이다. 그런 식으로도 인용 문장이 조직되기도 한다. 물론 이 작업이 '내 맘대로 해석하고 소화해서 재창조하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 취재원이 C라는 결론을 내기 위해 수많은 배경 설명을 해줬다고 하자. 이 경우 C라는 결론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C라는 문장 앞에 수많은 배경을 짧게 요약해줄 수 있는 어떤 표현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아전인수(我田引水)'하는 경우다. 이 경우 들은 내용을 그대로 옮겼지만 뉘앙스가 미묘하게 바뀌게 된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취재원의 의도를 잘 반영했다고 하기도 그렇다. 더 심한 것은 바로 의도적인 왜곡 또는 외면이다. '견강부회(牽強附會)'라고 할까. 일부 워딩을 살리거나 문맥을 삭제해 없던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흠, 여기까지는 쉽다. 기자들은 아전인수 견강부회하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면 된다. 그런데 문제에 문제에 문제가 꼬리를 잇는다. 이제 사람들의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이 이전과는 달리 굉장히 고도화(?)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미디어와 콘텐츠가 어디든 있으니, 뭐든 많이 접하면 실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 당직자나 정치인들의 교묘한 말장난에도 누리꾼들은 이제 잘 낚이지 않는다.
결국 요즘 시대의 기자들은 또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독자들이 알아서 이해하도록' 있는 그대로의 워딩을 전달해야 하는가, 혹은 나의 능력을 벼리고 벼려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정교하게 정리된 워딩을 전달할 것인가의 고민이다. 실제로 최근 언론사별 기사 몇 개를 살펴보면 인용에 있어 원래의 표현을 얼마나 살리는지에 대해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답은 없다. 나도 답이 없다. 여기까지 읽어내려 온 독자들께 죄송하지만, 내가 뭐라고 답을 제시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건, 관습적으로 말을 대충 오리고 오려 내 기사에 맡게 끼워 넣는 일부의 나쁜 습관을 이제는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래에 인용된 기사 때문. 이 기사가 어떤 취재 과정을 거쳤으며 실제 워딩은 어땠는지를 나는 알 길이 없다. 단지 이제는 이런 미묘한 워딩의 차이를 두고 기자와 인터뷰이가 설왕설래하는 것이 또 다른 스토리가 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물론 나 또한 이런 논란에 처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점에서 자아비판하듯 한 마디.
기자들이여, 큰따옴표를 좀 더 무서워 하자.